한국일보

30~40년대 스타 에롤 플린의 화려한 삶 영화화

2013-05-3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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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세 소녀 베벌리 아들랜드와의 관계 `로빈 후드의 마지막’ 애틀랜타서 촬영

30~40년대 스타 에롤 플린의 화려한 삶 영화화

에롤 플린의 빅히트작‘로빈 후드’(1938).

30~40년대 스타 에롤 플린의 화려한 삶 영화화

케빈 클라인

1930년대와 40년대 할리웃을 풍미했던 가느다란 콧수염의 절세미남 멋쟁이 에롤 플린과 15세 소녀 베벌리 아들랜드의 관계를 아들랜드의 눈으로 본 영화‘로빈 후드의 마지막’(The Last of Robin Hood)이 현재 애틀랜타에서 촬영되고 있다. 플린으로는 케빈 클라인, 베벌리로는 다코다 패닝 그리고 딸을 플린에게 소개한 베벌리의 어머니 플로렌스로는 수전 서랜든이 각기 나온다. 감독은 워쉬 웨스트모어랜드와 리처드 글래처. 영화의 원전은 플로렌스 아들랜드와 테드 토메이가 쓴 책‘빅 러브’.

‘시 호크’ ‘캡튼 블러드’ 및 ‘로빈 후드의 모험’ 같은 칼부림 영화로 유명한 플린은 1942년 33세 때 15세난 베벌리와 성관계를 해 미성년자 간음혐의로 기소됐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플린은 인기가 한창 때 술과 드럭과 여자로 완전히 자기 파괴적으로 인생을 즐겼는데 그의 여자 정복을 놓고 ‘인 라이크 플린’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1935년 ‘캡튼 블러드’로 대뜸 스타덤에 오른 플린은 이런 방종한 생활 때문에 40년대 중반에 들면서 얼굴이 보기 흉해지고 스타덤도 기울면서 1959년 50세로 사망했다. 그는 술을 너무 마셔 의사로부터 간이 문드러져 없다는 진단과 함께 술을 먹으면 죽는다는 선언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음주를 계속했다.


호주 태스마니아 태생의 플린은 1980년에 한 전기 작가가 쓴 책에서 나치 스파이라는 비난을 받았는데 그는 이런 주장과는 반대로 스페인 내전 때 공화파를 지지했고 피델 카스트로의 술친구였다.

베벌리를 플린에게 소개한 플로렌스는 할리웃의 명성과 스타에 집념하던 전직 웨이트리스로 딸을 플린에게 소개하기 전부터 딸의 미모를 이용, 자신의 목적을 이룬 여자였는데 플린의 주변 인물들은 플린과 베벌리가 서로를 진실로 사랑했다고 주장했다.

영화의 공동 제작자 팸 카플러도 “둘의 관계가 스캔들적이긴 하나 중년 남자가 베벌리 또래의 소녀와 사랑에 빠지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녀는 이어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진짜 러브스토리로 만들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플린은 베벌리를 자기가 제작한 ‘쿠바의 혁명녀’에 출연시켰으나 이 영화가 베벌리의 유일한 할리웃 영화다.

플린의 얘기는 여러 차례 영화와 TV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1982년의 코미디 ‘마이 페이보릿 이여’에서 피터 오툴이 연기한 술꾼 무뢰한 수퍼스타 앨란 스완은 플린에게서 영감을 받은 역이고 1985년에는 그의 삶이 ‘마이 위키드 위키드 웨이즈’라는 TV 영화로 만들어졌다. 또 가이 피어스는 ‘플린’(1993)에서 주드 로는 ‘비행사’(2004)에서 각기 플린으로 나왔다. 이들 영화는 다 플린의 화려한 삶을 묘사했지만 그의 미성년자에 대한 기호를 다루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플린은 스스로 그린 자신의 풍자화 속으로 사라진 배우로 말년에는 볼품없는 영화들에 나왔는데 다행인 것은 그가 이 같은 삶을 끝까지 즐기다 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한편 베벌리는 플린의 사망 후 두 번 이혼을 한 뒤 1969년 론 피셔와 결혼해 딸을 낳고 캘리포니아 팜데일에서 조용히 살다가 지난 2010년에 사망했다. 베벌리를 만났던 웨스트모어랜드 감독은 “베벌리는 할리웃에 집착한 여자가 아니다. 쇼 비즈니스를 재미로 여겼을 뿐 그 길로 나갈 생각이 없었던 사람”이라면서 “일단 할리웃을 떠나 제자리를 잡으면서 아주 평범한 사람으로 살았다”고 말했다.

명성과 그것의 대가에 관한 얘기이기도 한 이 영화는 요즘에도 변치 않는 사람들의 우상과 스타와 명성에 대한 집착을 다룬다는 면에서 시의에도 맞는 영화라고 웨스트모어랜드는 말했다.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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