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금문교 지역 박하 약초 많아‘예르바 부에나’명명

2012-12-2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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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 김의 길 따라 배우는 스패니시

▶ 탐험대 샌프란시스코 도착

당시 탐험대의 성직자들은 새로운 지역에 들어서면 그날이 어느 성자의 날인가를 따져서 이름을 짓곤 하였는데, 1769년 10월24일 성 그레고리오(San Gregorio) 날에 도착한 지역이라고 해서 지은 이름이 샌그레고리오 골짜기로 아직도 존재한다.

그곳에서 이틀을 머문 후 10월27일에는 푸리지마 밸리(Purisima Valley:가장 순결한 골짜기)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은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갔으며, ‘말과 소에게 물을 먹인 작은 호수’ 라는 뜻으로‘ 라고 데 필라르시코(Lago de Pilarcito)라고 이름 지은 호수에서 며칠을 머물렀다고 기록하였다.

이어 11월4일에는 지금의 샌프란시스코 공항 인근 호수인 샌안드레아스 호숫가에서 캠핑을 한 후 82번 엘카미노 리얼 프리웨이를 따라 금문교 입구까지 도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당시의 금문교 입구 지역에는 박하풀이 도처에 깔려 있어서 이 지역의 이름을 예르바 부에나(Yerba Buena: 약초 혹은 박하 약초라는 스패니시)라고 지었다(이 지역명은 1846년 미국시대에 가서야 샌프란시스코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가스파르 데 포르톨라 알타 캘리포니아의 주지사는 지금의 금문교 입구에서 천연항인 샌프란시스코 만의 북쪽 지역을 바라보면서 깊은 상념에 빠졌는데, 그 이유는 이랬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지역은 국토 분쟁 지역이었다. 1542년 스페인의 왕명으로 후안 로드리게스 카브리요가 최초로 캘리포니아를 탐험하여 샌프란시스코를 처음으로 발견했으며, 그 후 1579년 영국 해적 출신의 드레이크경은 지금의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북쪽에 정박한 후 그 지역을 뉴 알비온이라고 이름짓고 그 지역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소유로 정하였던 지역이었다.

1700년대 후반부터 알래스카를 발견한 러시아인들이 남하하여 북캘리포니아 지역에 출몰하기 시작하였다.

1799년부터 러시아인들은 아예 북캘리포니아 해안가 보데가( Bodega:창고라는 뜻의 스패니시) 만 가까이에 상륙하여 포트 로스(Fort Ross: 로스는 러시아를 애칭하는 말)라는 요새를 만들었으며, 1812년부터는 러시아인들이 샌프란시스코 북쪽 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영국과 미국 국적의 배들이 캘리포니아 해안가를 넘나들며 바다표범과 물개 밀렵을 하기 시작했고, 16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까지 바다 동물의 모피가죽과 고래기름등의 무역거래 활성화로 인해 러시아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의 어선들이 지금의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인근 해역에 나타나면서 샌프란시스코 주변 지역에 긴장이 감돌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변화에 불안을 느낀 스페인 국왕은 1769년 2월에 최초로 육지와 해상을 통한 주니페로 세라 신부를 주임 신부로 그리고 바하 캘리포니아의 집정관이었던 가스파르 데포르톨라를 알타 캘리포니아의 주지사로 임명하고 최초의 캘리포니아 탐험대를 이주민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파견하였던 것이다.

그 분쟁 지역의 중심인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포르톨라 주지사의 캘리포니아 탐
험대는3일 정도 더 체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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