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강신용의“ 부자로 가는 길”

2012-12-0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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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 내음

지난 10월 말 한국에 다녀왔다. 가을을 머금은 산과 들이 붉게 물들었다. 옹기종기 둘러앉은 집집마다 붉은 머리띠를 두른 듯 감나무 울타리를 만들고 있다. 높고 푸른 하늘이 줄지어선 배추포기와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풍경화 같이 보인다. 흔들리는 시외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경남 밀양의 모습은 어릴 적 떠난고향에 온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가 문득 생각난다. 하동과 밀양이 같은 경남이라서 인지 감나무가 많이 보인다. 나의 어린 시절을 보낸 상주는 감에 대한 추억이 유난히 많은 곳이다. 처음 익은 홍시를 어머니께 드리는 것은 커다란 자랑이었다. 홍시는 큰 감나무의 맨 꼭대기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나무 꼭대기에서 까치가 맛보기로 쪼아대면 그 상처로 빨리 홍시가 되는 것이다. 앞밭 뾰족 감나무에 제일 먼저 홍시가 열리곤 했다. 위험하게 따내온 홍시를 반으로 뚝 잘라 주시면서 대견하게 나를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따뜻한 눈길이 시골집에서 느껴진다 .

땅은 생명이라고‘ 토지’에서 말한다. 호미 들고 밭고랑을 매시던 어머니가 문득 떠오른다.


땡볕을 피해 감나무에 기대어 머릿수건으로 땀을 닦던 어머니의 모습이 가슴속에서 뭉클거린다. 먹거리가 귀하던 시절에 산천 초근목피가 모두 먹거리였다. 보릿고개는 쌀 한 톨 없이 지은 꽁보리밥에 피감자로 몇 달이나 먹고 지내던 시절이었다. 어머니가 호미로 캐던 감자는 땅이 잉태한 생명이었다.

처음 중국 관광을 다녀왔다. 단군 시조 이래 지난 5,000여년동안 한국이 중국보다 경제적으로 앞섰던 것은 지난 20여년이 처음이라고 한다.

사적지 이곳저곳에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많이 보인다. 공부하면서 배웠던 사적지를 현지에서 직접 보고 들으니 규모가 거대하고 웅장한 것에 감탄하게 된다. 서태후의 이화원이라는 여름 궁전은 약 650에이커나 된다고 한다. 골프장 다섯개쯤 되는 크기에 별장이다. 약 500에이커에 이르는 곤명호는 사람이 삽으로 파서 만들었고, 그 판 흙으로 만수산을 쌓았다고 한다. 친절하게 설명하는 조선족 가이드의 표정 속에 미묘한 대국의 긍지가 느껴진다.

중국에서 구글로 인터넷에 접속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중국에서는 구글과 아이폰이 인기가 없다고 한다. 센카쿠 섬을 구글맵이나 아이폰에서 일본 영토로 표시했기 때문에 불매운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두 나라가 땅 싸움을 하는 것이다. 중국은 댜오위다오 섬이라고 하고 일본은 센카쿠 섬이라고 한다. 마치 대한민국은 독도, 일본은 다케시마로 부르는 것과 같다. 망망대해에 있는 자그마한 돌섬도 땅이라고 싸우는 것이다. 일본은 임진왜란과 대동아전쟁을 일으켜 한국과 중국을 차지하려는 야욕을 가졌다. 땅은 생명을 키우고 지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피를 뿌리며 생명을 요구하는 무서운 본성을 가지고 있다.

땅은 사람을 지배하고 하늘은 땅을 지배한다고 한다. 한자로 인법지지법천(人法地, 地法天)이라고 쓴다. 한 평의 땅에 농사를 지으면 한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다고 한다. 잠자는 것도 죽으면 묻히는 것도 한 평이면 족하다. 성경 속 낙원은 꿀과 젖이 흐르는 땅이다. 신은 땅과 공기와 햇볕이란 자연을 통해 우리를 축복
해 주었다. 땅은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는 꿀도 주고 가족이 함께하는 젖줄과 같은 안식처이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은 한 줌의 폴란드 흙을 프랑스에 가지고 왔다. 프랑스로 망명하여 가난하고 고독할 때마다 조국의 흙냄새를 맡으며 피아노 연주와 작곡에 열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미국에 살고 있는 동포들도 시시 때때로 크고 작은 일로 눈물 흘리며 살아간다. 지금도 먼 그곳을 바라보고 그리운 얼굴들을 생각하며 눈물 나게 일하는 동포들이 주변에 있다. 쇼팽은 유언으로 자신이 죽으면 조국의 흙을 자신과 같이 묻어달라고 했다. 쇼팽의 가슴속에 고국은 영원히 한 줌의 흙과 함께 했다.

조선족 가이드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갈등하고 있었다. 분명히 중국에서 나서 중국 국적의 중국인이지만 자신은 한국 동포라고 느끼고 있었다. 조선족 자치주에서 한국말로 한국인 학교에서 교육받은 한국적 정서를 가진 순박한 우리와 똑같은 동포였다.


조선족 동포의 모습에서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는 미국 동포 자녀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부모처럼 아이들도 김치를 좋아하고 쌀밥에 된장찌개를 좋아한다. 한편 햄버거와 튀긴 감자에 콜라를 마시며 미국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다. 미국계 한국인이나 중국계 조선족이나 우리는 똑같이 이국생활에 갈등하며 살아가고 있다.

태어난 곳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뿌리를 땅속 깊이 내려야 한다. 이민세대는 쇼팽과 같은 열정으로 멸시와 고통에 부대끼면서 여기까지 왔다. 한 평의 땅에라도 우리의 뿌리를 내려야 한다. 어차피 신대륙은 시간적 차이만 있을 뿐 이민의 나라가 아닌가. 초가삼간 집이던 돌밭이던 생명을 잉태하는 땅을 가져야 한다.

흙냄새를 땅에서 맡아야 한다. 호미 들고 가꾸던 삽으로 퍼내던 이 땅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이 땅에 뼈를 묻고 조상이 되면 우리의 후대는 이 땅에서 흙냄새를 맡을 것이다. 내 땀이 젖은 땅에서 흙냄새를 맡고 싶다.

공인회계사, 수필가 (213)380-3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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