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교수가 대선출마를 선언한 후 지난 주말 방영된 한국 TV의 한 시사 토론 프로그램을 보니 그의 등장에 보수층이 긴장하고 있음이 역력해 보였다. 토론에 나온 한 보수논객은 야당의 문재인 후보는 대단히 훌륭한 인물이고 만약 야권후보 단일화가 되어야 한다면 문 후보가 되는 것이 순리라고 주장했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경쟁상대로 문재인이 더 만만하다는 계산이 읽히는 꼼수성 발언이다. 그만큼 집권세력은 안 후보의 등장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
과거사와 관련해 오불관언의 오만함을 보여 왔던 박근혜 후보가 24일 박정희 시대의 일그러진 정치에 대해 사과성 발언을 내놓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박 후보는 지난주까지만 해도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평가는 후대에 맡겨야 한다며 고집불통의 태도를 보였다. 그랬던 그가 입장을 바꾼 것은 긍정적으로 볼 부분이 있지만 어딘지 흔쾌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거의 전 생애에 걸쳐 단단히 간직해 왔을 소신을 그렇게 쉽게 며칠 사이에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박 후보는 증오에서 관용으로, 분열에서 통합으로 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만약 안철수가 등장하지 않고 박근혜 대세론이 굳어져 가는 상황이었다면 이런 발언이 나올 수 있었을까 의문이다. 안 후보 출마선언 후 그의 지지율이 급등하고 자신의 지지율은 곤두박질치자 이를 막아보자는 뜻에서 나온 정치공학적 발언으로 보이지만 일단 유권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던진 말인 만큼 책임을 기대해 본다.
나는 달라진 박근혜의 태도에서 안철수의 등장이 지니는 의미를 확인하게 된다. 지난 수십년간 한국 정치를 지배해 온 키워드는 ‘증오’이다. 정치인들은 증오를 밑거름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왔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핵심 정략이 바로 ‘증오의 일상화’였다.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유지하고 넓히기 위해서라면 증오의 씨앗을 퍼뜨리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겉은 하나의 공화국이지만 속은 두 개의 나라로 갈리어 반목과 분열을 계속해 왔다. 선거는 국민을 위해 멸사봉공할 올바른 인물을 선출하는 합리적 과정이라기 보다는 맹목적인 적대감이 지배하는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돼 버렸다.
여기에 언론들이 한 몫 했음은 물론이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팩트만 고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버리거나 왜곡하는 방식으로 뉴스 수용자들을 다른 생각에 대해 으르렁거리는 사나운 싸움개로 만들어 왔다.
원인과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시급한 것은 이 같은 현실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하루속히 고치는 일일 것이다. 안철수 바람의 진원지는 바로 이것을 깨달은 국민들이다. 이대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위기감이 새로운 인물에 대한 대망과 뜨거운 감응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대선이 기성 정치권의 대결로 시종했다면 대선 후의 대한민국은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박근혜가 승리하면 그녀가 말한 ‘100% 대한민국’이라는 꿈이 현실화 될 수 있을까. 가능성은 희박하다. 박 후보를 지지하는 40%의 묻지마 지지층이 있지만,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될 후보 여론조사에서도 나타났듯 같은 비율의 국민들은 그녀에 대해 생래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다.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가 다른 정치인들보다는 맑은 품성을 가지고 있을지 몰라도 상대 세력에게는 그저 깨부수어야 할 적일 뿐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여전히 정치의 일상이 돼 있을 것이다.
안철수의 등장은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아 온 이런 증오의 정치를 어느 정도나마 불식시키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배경과 성향으로 볼 때 민심의 교집합을 가장 크게 만들어 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안 후보의 도전이 냉혹한 현실정치에서 어떤 열매를 맺을지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과거사와 관련한 박근혜 후보의 전향적 입장 표명에서 나타났듯이 안철수의 존재는 그것만으로도 이념의 양극화에 갇혀 있는 한국정치의 판을 흔드는 자극제가 되고 있다. 안철수의 등장이 경쟁자들에게는 달갑지 않겠지만 모처럼 체질변화의 가능성을 던져주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정치의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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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