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1776년 인디언 거주지에 유럽풍 건물 건축

2012-06-2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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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션 샌후안 카피스트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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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9년 7월23일, 샌후안 카피스트라노강을 따라 내륙 쪽으로 향하던 탐험대는 물줄기가 둘로 갈라지는 지역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인디언 마을을 발견하였다.

크레스피(Crespi) 신부는 그 지역에 겨자씨를 뿌리고 인디언 부족들에게는 샌후안 카피스트라노(San Juan Capistrano) 강에서 이름을 딴 후아네뇨(Juaneno; 후안 지역 주민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이 지역이 오늘날 74번 Ortega Hwy가 지나는 곳이다).

당시의 인디언들이 살던 거주지는 ‘키이차스’(Kiichas)라고 불렀는데 이는, 쉽게 구부러지는 버드나무의 가지를 이용하여 프레임을 만들고 갈대를 엮어서 벽과 지붕을 완성하였다. 프레임은 땅속에 2인치 정도 박아놓아 기둥역할도 겸했는데 주위에 돌들을 괴어서 지지대 보강을 하였다. 지붕 한복판에는 환기 및 조명을 위해서 구멍을 뚫어놓았는데 비가 오거나 날씨가 추워지면 동물의 가죽으로 지붕과 출입구를 막아 놓았다고 한다.


간혹 이동 때에는 불을 질러 키이차스를 소각시키고 필요한 가재도구만 챙겨 이동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이런 인디언들의 거주지역에 1776년 유럽풍의 건물인 미션 샌후안 카피스트라노(Mission San Juan Capistrano)가 세워졌다. 오렌지카운티에서는 유일하게 세워진 미션으로 이는 엘카미노 리얼(El Camino Real)의 21개 미션 중 7번째로 지어진 건축물이 되었다.

당시 이 성당의 건물은 진흙과 풀, 모래, 돌을 섞어서 반죽한 뒤에 틀에 넣어 벽돌모양을 만든 후 햇빛에 건조시킨 아도베(adobe)라는 흙벽돌로 지어졌는데, 1812년 12월8일 주일 아침미사가 시작되던 시각에 남캘리포니아를 강타한 7도 지진으로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당시 미사를 보던 40명의 인디언과 종을 울리던 두 명의 인디언 소년을 포함 42명의 신도들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샌후안 카피스타라노 미션은 다른 곳에 비해 유난히 많은 인디언을 크리스천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케이스에 속했다. 1790년에는 700여명의 인디언이 세례를 받았고, 6년 후에는 1,000여명 이상의 인디언들이 크리스천으로 개종했다.

계속된 인디언 부족들의 개종과 더불어 교회의 토지도 늘어나면서 캘리포니아 포도의 상징인 미션 그레이프(mission grape)가 처음으로 심어졌고, 1783년에 캘리포니아 최초의 와인이 이곳에서 생산되면서 포도농장 와인 양조장이 형성된 곳이기도 하다. 그 후 이 지역은 산기슭에서 포도재배와 목축업이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농업지대로 발전하면서 범위를 넓혀나갔다.

그러나 1833년 멕시코 정부가 출범하면서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눠주는 정책을 쓴 이른바 랜초시대에 돌입했다.

그 당시 교회가 소유한 토지는 오렌지카운티 전체에 해당되는 크기였는데 그 교회 토지가 20개로 분할되어 목장으로 만들어지면서 교회도 해체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가 1850년 캘리포니아가 미국의 주로 편입된 후,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험 링컨이 미션 건물을 가톨릭교회에 돌려주는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44에이커의 토지와 건물이 교회에 반환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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