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샌카를로스함은 겨울 폭풍우와 안개로…

2012-05-1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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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디에고로 출항한 샌카를로스함은 둘째 날부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맞바람으로 인하여 배는 앞으로 전진을 할 수 없었으며 설상가상으로 겨울 폭풍우와 안개로 말미암아 방향마저 잃고 말았다.
가장 최악인 것은 페스트의 창궐이었다. 태평양 쪽으로 떠 밀려온 배는 식수통이 깨지는 바람에 그들은 잠시 낯선 섬에 정박하여, 새 물통에 물을 담았는데 그 물이 오염된 물이었다. 그 물을 마신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는데, 페스트균에 면역성이 없는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승무원들조차도 병에 걸리는 바람에 배의 운행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1769년 4월 초, 지치고 병이 든 채로 샌카를로스함은 100여일이 지난 후에야 겨우 샌디에고의 포인트로마(Point Loma; ‘꼭짓점 언덕’이라는 뜻) 항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두 번째 함선인 샌안토니오는 라파즈(La Paz)를 출발한 지 55일 만에 이미 포인트 로마 항에 정박한 채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샌카를로스함의 사정을 모르고 마중나온 샌안토니오 선원들도 곧 전염병에 감염됐고, 2주 후에는 페스트 환자 격리수용실에서 매일 두세 명씩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그들에게는 충분한 음식도 없고 의료진이나 약품도 없는 상태였다.

세 번째 배인 샌호제는 아예 샌디에고에 모습도 보이지 못한 채 실종되고 말았다.
5월14일 90여명의 환자 중 겨우 16명만이 생존하고 있을 때 마침내 육로 팀의 선발대가 도착했다.
육로 팀의 선발대는 리베라(Rivera)와 몬카다(Moncada) 사령관 휘하의 부대로 후니페로 세라(Junipero Serra)
신부의 제자이며 오랜 친구인 프래이 후안 크레스피(Fray Juan Crespi) 신부와 그 일행들이 동행했는데, 같은 해 3월 바하 캘리포니아의 로레토(Loreto; 검은 갈색 피부를 지닌 사람이라는 뜻)에서 육로를 따라 출발했었다.


이들은 42명의 크리스천 인디언들과 상당량의 보급품을 실은 수십 마리의 당나귀, 그리고 로레토 요새의 25명의 왕실 정예병들(이들이 착용한 갑옷은 사슴의 가죽으로 특수 제작되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인디언의 화살도 뚫지 못했다고 한다)이 참가했는데 특히 이들 정예병들은 잘 훈련된 대원들로 기마술이 능하고 수많은 전투에 참가했던 베테런들로 이루어졌었다.
이들을 인솔한 장교는 후안 호세 도밍게즈(Juan Jose Dominguez)인데, 이 사람은 후에 스페인 왕으로부터 토지를 하사 받은 최초의 인물로 기록된 사람이기도 하다. 도밍게즈는 당시 33세의 나이로, 주로 북부 멕시코와 바하 캘리포니아에서 군복무 생활을 13년간이나 한 베테런급 직업군인이었다.

이들 선발대는 산을 넘고 사막을 건너며, 때로는 인디언들과 싸우기도 하면서 뒤따라오는 본진의 길을 열어주며 샌디에고에 도착하였다.
샌디에고에 도착한 육로 팀의 선발대는 우선, 야전병원을 만들고 전염병의 치료에 힘을 기울였으며 정착민들이 정착하기 가장 적합한 지역(바다와 가까우면서도 풍부한 수자원과 농작물 재배를 위한 기름진 땅이 어우러진 곳)을 찾아내어 미션 탐험대 본진이 도착하기 전에 정착을 위한 기초시설을 다지기 시작했다. 바로 샌디에고 강을 낀 남쪽지역이었는데 도밍게즈 부대도 같은 지역의 둔덕 위에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이 지역이 바로 오늘날 바자 델 문도(Bazar del Mundo; 세상의 장터라는 뜻)가 속해 있는 샌디에고의 올드타운과 미션힐 인근 지역이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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