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소토 20대 초반에 무역·탐험으로 이름 날려

2012-03-3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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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토 20대 초반에 무역·탐험으로 이름 날려

John Kim의 Spanish Class (323)346-7749

아메리카에 도착한 소토는 파나마에서 무역업자이자 탐험가로 두각을 나타냈는데, 재치와 과감한 판단력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그는 총독이었던 에르난 폰세 데 레온(Hernan Ponce de Leon)과 프란시스코 캄파뇬(Francisco Campanon)의 후원으로 지금의 니카라과와 파나마 지협을 무대로 무역을 해서 20세 초반인 1520년에 이미 상당한 재산가가 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했다.

1530년에는 태평양 연안의 다리엔(Darien: 지금의 콜롬비아 북서부)에 황금의 도시인 엘도라도(El Dorado)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실제로 조사에 착수하던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에게 2척의 배를 제공해 주면서 그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1531년 피사로는 원정을 통하여 황금의 도시에 관한 사실을 어느 정도 확인하였고 피사로는 배를 제공해준 보답으로 소토를 자기의 수석부관으로 임명하였으며, 이듬해인 1532년에는 파나마에서 출발한 페루 정복에도 함께 나서게 되었다. 이 원정에서 소토는 기병대장을 맡아 수색대를 이끌고 고산지대를 탐사하던 중 카하마르카(Cajamarca)로 향하는 길을 발견하였다. 그 공로로 피사로의 사신으로 임명된 소토는 잉카제국 황제인 아타우알파(Atahualpa)와 접촉한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


다음날 피사로의 본진이 도착하였고 피사로의 스페인 군대는 잉카제국 황제와의 회담 중 아타우알파를 인질로 잡은 후, 몸값으로 황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소토는 황제 아타우알파가 인질로 잡혀 있는 동안에도 친구이자 보호자가 되어 그를 돌보았다. 그러나 황제의 몸값으로 엄청난 황금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피사로는 아타우알파가 잉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황제를 처형시켜 버리기로 결정을 하였다.

그는 소토에게 잉카 군주의 처형을 명령하였으나 이를 거부한 소토는 피사로의 미움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신대륙의 생활에 환멸을 느낀 소토는 1536년 스페인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의 수중에는 이미 잉카제국의 정복의 대가로 얻은 1만8,000온스 상당의 황금이 있었다. 그가 페루를 정복하면서 모은 재산은 피사로의 절반도 안 되었지만, 정복자로서 귀환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기에 충분했다고 한다.

그 후 무력충돌 없이 수도인 쿠스코를 점령한 스페인 군대는 2년 만에 잉카제국을 점령하고 1534년 카를 5세에 의해 부왕관할 지역으로 승격되면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 부왕 령이 된다.
한편 소토는 스페인 세비야에 정착해 부유한 삶을 영위하였으며, 1537년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한동안 평온했던 그의 삶은 허풍쟁이 카베사 데 바카(Cabeza de Vaca; 소대가리 라는 뜻의 스패니시)가 나타나 플로리다 탐험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미지의 세계를 향한 야망에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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