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줌마들의 밸런타인스 데이

2012-02-20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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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친구들 몇 명과 집 근처에 새로 생긴 고기 뷔페식당에 가자고 약속한 날이 공교롭게도 밸런타인스 데이였다. 그냥 강행해야 한다는 측과 그래도 밸런타인스 데이인데 어떻게 여자들끼리만 나가느냐는 등 의견이 분분했다. 아니 각자의 휴대폰으로 문자가 바쁘게 오갔다.

한 친구는 “결혼한 지가 몇 년인데 아직도 밸런타인스 데이를 챙기느냐? 그냥 우리끼리 놀자”고 했고, 다른 친구는 남편이 자기가 친구들과 저녁 먹을 수 있게 아이들을 봐주는 것으로 선물을 때우려 한다고 했다.

상대적으로 늦게 결혼해서 아직 신혼 분위기인 친구는 그래도 밸런타인스 데이인데 자기 혼자 나가면 남편이 싫어할 거라며 울상을 했다.
그러다가 남편들이 이런 날이면 어떤 선물을 해주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그 질문이 나오기가 바쁘게 결혼 전에 그토록 ‘이벤트의 달인’이던 남편들이 결혼하고 나자 놀라운 속도로 변해간다며 한 목소리가 되기 시작했다.


회사 동료들 앞으로는 꽃바구니가 배달되는데 자기 남편은 전화 한 통으로 때웠다는 둥, 작년에 준 밸런타이스 데이 카드가 일년 동안 신발 상자 안에 있었는데 찾지도 않더라는 둥, 무슨 아줌마들이 그런 걸 챙기느냐며 그냥 고기집에 가라고 했다는 둥… 불만도 다양했다.
생각해보니 나도 할 말이 많았다. 나는 매년 남편이 좋아하는 초컬릿과 카드를 잊지 않고 안겼거늘, 남편은 해를 거듭하며 꽃송이가 줄더니 최근 몇 년간은 숫제 기억에 없다.

연중 가장 꽃값이 비싸다는 밸런타인스 데이에 꽃바구니 한아름 들고 집 앞에서 기다리던 그 남자, 콘서트 티켓을 살포시 카드 안에 넣어 주던 그 남자는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말이다!

남편은 특별한 날이나 생일 같은 날에 선물을 준비하는 것 자체가 무척 힘든 사람이다. 심지어 작년 밸런타인스 데이에는 내가 둘째를 출산하고 병원에 있다는 이유로 카드마저 생략했다.

그나마 나의 세뇌 덕분에 남자가 여자에게 선물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남편은 어디서 들었는지 한국에서는 이 날 여자들이 선물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기고만장 해졌다. 이제부터는 선물을 안 해도 되겠다는 뉘앙스마저 비쳤다.

차라리 마음 맞는 친구들이랑 저녁모임을 갖는 편이 나을 것도 같았지만 그렇다고 결혼 8년 만에 밸런타인스 데이에 고기집 가는 아줌마로 전락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이번 밸런타인스 데이에 아줌마들의 회동은 없었다. 아줌마 친구들은 각자의 집에서 저녁을 준비했다. 우리 가족도 그냥 평범한 저녁 식사를 했고, 식후 디저트로 아이가 학교 친구들에게서 받아 온 초컬릿을 나눠 먹었다.

다음 날, ‘모임을 강행하자’던 친구의 페이스북에 해피 발렌타인이 장식된 케익 옆에 아빠와 아이들이 초를 불고 있는 사진이 보였다. 또 다른 친구의 홈피에는 남편이 돈다발 든 꽃다발을 선물했다며 감동의 눈물을 흘린 후기가 올라왔다. “무슨 아줌마들이…” 했다던 친구의 남편은 아내에게 아이패드를 안겼단다.

내 남편은…. 나의 남편은 요즘 회사에서 일이 많아 선물을 준비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은 늘 내 편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아이들의 사진과 편집해서 줬다. 이만하면 새로 생긴 고기 뷔페를 포기한 대가치고 나쁘지 않다.


지니 조/ 마케팅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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