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가던 무렵부터 더 이상 무언가를 준비하거나 계획하면서 들뜬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지 않게 되었다. 어른이 되면서 학년이 바뀌어 정들었던 친구들과 이별하고 새로운 선생님,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 일도 없고,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고 이루고 싶은 열망도 점차 사그러 들었다.
무엇을 배우는 것은 그저 취미생활을 위한 것이거나 경제활동을 위한 것일 뿐인 어른들에게 새해란 그저 나이 한살 더 먹는 날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을 무덤덤하게 맞이하는 것, 그것이 내가 어른이 된 후 새해를 맞이하는 자세였다.
그래서 새해가 왔다고 대단한 포부를 지니거나, 작심삼일일 것을 뻔히 알면서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들을 다이어리에 끄적여 대는 일을 그만둔 지 오래다. 그러니 번잡스러운 연말도, 마치 무슨 새로운 각오라도 되새겨야만 할 것 같은 새해도 그리 반갑지 않았다.
결국 시간이라는 것, 초 분 시, 일 월 년이라는 개념도 그저 쭉 펼쳐지는 시간을 일정한 간격으로 차곡차곡 접어 개어놓자는, 사람들 사이의 약속일 뿐. 시작도 끝도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며 삶이지 않은가.
방금 맞은 새해 또한 우리들의 약속된 시간 속에서의 시작이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강물같이 흘러가는 시간,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우리는 안다. 한해가 가고 새해가 온다고 인생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저 또 하루가 시작되고 또 하루가 저물 뿐. 우리는 인생의 계단 어느 즈음에 서서 한걸음씩 발을 디디며 앞으로 나아갈 뿐이라는 사실을.
더 이상 새로운 무언가를 기대하고 설레며 맞이하는 새해는 아니다. 그러나 그 시간의 흐름을 타고, 흘러 흘러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나 자신을 가만히 바라본다. 내 의지로 시작된 생이 아니며, 언제 어디서 어떻게 끝을 맺을지 모를 나
의 삶.
한발짝 물러나 내가 살아온 시간을 되짚어보면 내 의지로 내 노력으로 이루어진 일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스스로 애써왔다고 생각했지만 많은 일들은 불가사의하게 또는 우연처럼 내게 일어났고 또 그렇게 지나갔다. 그저 난 묵묵히 그 시간 속을 걸어 나아갔을 뿐...
그 길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과 일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행복했던 순간도, 고통과 괴로움의 순간도 그 모든 순간들은 질료가 되어 나란 존재를 빚어냈다. 그래서 감사한다. 내가 지나온 모든 시간에,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게도.
새해를 맞이하는 각오 같은 것은 없다. 어제를 보내고 맞이하는 오늘일 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가슴 깊이 새긴다. 내게 주어진 오늘의 삶이 은총이란 것을. 그리고 내가 서 있는 자리가 그 삶의 ‘은총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란 것 또한 이만큼 나이가 먹고서야 알게 되었다. 내 인생의 시작이 은총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김남조 시인의 ‘설 일(雪 日)’을 되뇌어 본다.
“겨울나무와 / 바람 /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 나무도 바람도 / 혼자가 아닌 게 된다. // 혼자는 아니다 /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 나도 아니다 / 실상 하늘아래 외톨이로 서보는 날도 / 하늘만은 함께 있어주지 않던가 // 삶은 언제나 / 은총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 사랑도 매양 / 섭리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 말없이 삭이고 /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 한세상을 누리자 // 새해의 눈시울이 /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 다시 땅위에 떨구이는 / 백설을 담고 온다”
김진아/ 광고,전략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