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알바라도 스트릿(1) 멕시코 점령시대 가주 주지사 기리는 길

2011-10-2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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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잔 김의 길 따라 배우는 스패니시 [30]

코리아타운과 다운타운 사이에 있는 알바라도 스트릿(Alvarado St.) 거리는 북쪽의 글렌데일 블러버드(Glendale Blvd.)와 만나 2번 프리웨이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후버 길(Hoover St.)과 만나면서 끝나는 짧은 길이다.

이 길은 멕시코 시절 1838년부터 1842년까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역임했던 후안 바우티스타 발렌틴 알바라도(Juan Bautista Valentín Alvarado)를 기리는 길로, 주지사 알바라도가 살던 시절의 캘리포니아는 정치적, 외교적, 사회적으로 복잡 미묘하고 불안정했으며 매우 어수선한 상태였다. 캘리포니아 역사적으로 볼 때도 매우 중요한 시점이라 4회 분량으로 간략하게 다뤄보자.

캘리포니아가 스페인 영토였음에도 불구하고 1579년 7월17일 당시 영국인 해적 드레이크(Drake)가 지금의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북쪽에 정박한 후(아직도 그의 이름을 따서 드레이크 항만이라고 부른다), 그 지역을 뉴 알비온이라고 이름 짓고 그 지역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소유라고 정하는 바람에 영국이 영토 주장에 나서는가 하면, 알래스카를 발견한 러시아가 알래스카의 식량 조달을 위해 1799년 Russian American Fur Company라는 모피회사 이름으로 북캘리포니아 해안가에 Fort Ross라는 요새(이 곳은 샌프란시스코로부터 50마일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는 미합중국 역사 보존지역으로 보호받고 있다)와 함께 농장을 건설하여 1812년부터 러시아 농부들이 이 지역에 거주하여 농사짓기 시작했다. 또 프랑스인들도 비슷한 시기에 캘리포니아 해안가를 넘나들면서 바다표범과 물개를 밀렵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16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까지 바다표범의 모피가죽 무역의 활성화로 모여든 러시아인, 영국인과 미국인, 프랑스인들이 지금의 샌프란시스코와 북쪽 소노마 지역을 분쟁지역으로 만들며 거주하기 시작했던 때였다.

알바라도는 스페인 시대인 1809년 2월14일 알타 캘리포니아의 몬트레이시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아버지 프란시스코 알바라도(Francisco Alvarado)가 사망하고 그의 모친 마리아 호세파 바예호(MariaJosefa Vallejo)가 재혼하는 바람에 그는 외조부모 밑에서 성장하였다. 어린 시절 그는 영국인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으며 자라나 영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1827년 그의 나이 18세부터 관청의 비서직으로 일하며 정치에 관한 실무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1833년 새로 임명된 주지사 호세 루이스 피게로아에 의해 21개의 교회 재산이 분할되어 목장으로 변했다. 캘리포니아주 정부는 그 해 8월, 교회 재산이 1만8,000명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이전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수백만 에이커의 토지가 역시 나뉘어져서 캘리포니아 주민들에게 분배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 700여교회 대지가 각기 1만5,000에이커씩 분배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알바라도도 1834년 10월30일 호세 피게로아 주지사로부터 토지를 얻어서 랜초 엘 수르라는 목장의 소유주가 됐는데, 이는 새로운 계층의 백인 목장주들이 탄생하는 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캘리포니아에는 목장주라는 새로운 부류가 각계각층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1835년 피게로아가 사망하자 새로 부임한 주지사 니콜라스 구티에레스(Nicolas Gutierrez)와 목장주들 간에 불화가 일기 시작했다.

무상 공급한 땅에 대한 보상으로 멕시코 정부는 캘리포니아의 목장주들에게 세금을 높게 부과한 것이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멕시코 정부의 강압적인 정책에 대항하여 알바라도와 카스트로의 주도 하에 캘리포니안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다음 주지사였던 마리아노 치코(Mariano Chico)는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멕시코로 탈출하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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