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 잔 김의 길 따라 배우는 스패니시 <3> 피코(Pico)

2011-04-08 (금)
크게 작게
■ 잔 김의 길 따라 배우는 스패니시 <3>   피코(Pico)

피코라는 명칭의 근원인 피오 데 헤수스 피코.

19세기 가주 정계 큰 족적 남긴 인물

코리아타운 남쪽에 있는 피코 블러버드(Pico Boulevard). LA에 살다보면 하루에 최소 한두 번은 지나는 친숙한 길이다.

스패니시인 피코는 역사적인 인물의 이름을 딴 것이다. 지난주 소개됐던 펠리츠 일가와 마찬가지로 주둥이, 부리, 혹은 꼭지라는 뜻이 있는 Pico는 피오 피코 가문을 일컫는다.


코리아타운에 있는 피오피코 도서관(Pio Pico Library)의 명칭도 여기서 빌려 왔다.

멕시코의 알타 캘리포니아 제14대 주지사였던 Pio Pico의 정확한 이름은 Pio de Jesus Pico(피오 데 헤수스 피코·1801~1894)인데 줄여서 ‘피오피코’라고 불렀다.

그는 1801년 5월5일 LA의 Mission San Gabriel 예배당에서 피코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장교로 복무 중이던 1828년 Territorial Assembly 맴버로 큰 공을 세운 후 다음 해인1841년, 샌디에고 인근에 8,922에이커에 달하는 Rancho Jamul 목장을 하사받았고, 또 그와 그의 형제들 이름으로 13만3,441에이커나 되는 Rancho Santa Margarita 목장을 하사받았다.

그 후의 Pico는 대부분의 시간을 LA에서 보내게 되고, 1831년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에는 잠시 Mission San Luis Rey의 행정관을 지내기도 했다. 1834년 Maria Ignacia Alvarado와 결혼을 한 그는 마지막 알타 캘리포니아 주지사(1845~1846년)를 지냈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에는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곳 캘리포니아를 알타(Alta: 높은, 위의) 캘리포니아라고 불렀고, 현재 멕시코 땅인 아래의 캘리포니아를 바하 캘리포니아라고 불렀었다. 여기서 바하(Baja)는 ‘낮은’ 또는 ‘아래’라는 뜻이다.

남가주에는 지금도 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피오피코 도서관은 물론이고, 다운타운 센트럴 애비뉴에서 샌타모니카까지 이어지는 피코 블러버드, 피오피코 학교, 피코 리베라시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불우했다.

1870년 그는 샌퍼낸도밸리의 땅들을 처분해 지금의 까예 올베라(Calle Olvera)에 피코 하우스라는 80개의 객실을 갖춘 3층 건물의 럭서리 호텔을 지었지만, 10년 뒤 모든 재산을 잃고, 말년에는 위티어 지역의 한 농가에서 어렵게 살다 생을 마감했다.

Pio de Jesus Pico는 군인이자 사업가였고, 정치인으로 LA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앤젤리노로 기억되고 있다.
John Kim의 Spanish Class
(323)346-7749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