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많은 석굴들은 불교 유물의 보고

2010-07-0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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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가 이형숙의 실크로드를 가다

▶ <4> 간수성의 둔황

불상·경전 모시고 벽화 그려 놓아
사막의 건조함 덕에 보존상태 양호
237호 동굴엔 신라왕자 모습 보여


실크로드의 가장 중요한 교역지 중 하나인 둔황(Dunhuang)은 간수(Gansu)성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성은 가늘고 긴 모양으로 산, 고원, 평야, 강, 그리고 사막까지 다 한곳에서 볼 수 있는 아주 특수한 지형을 갖고 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모래바다 속에 떠 있는 조그마한 섬 동네를 연상시키는 둔황은 황화가 흘러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자리 잡고 살아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마을이다.

도시에 도착하면 온통 선녀 그림으로 도시가 다 차 있으며, 이 도시를 ‘선녀의 도시’(City of Angel) 또는 ‘비천의 도시’(City of Flying Angel)라고 부르는데 이는 모두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막고 굴(Mogao Grotto)의 벽화에서 많은 선녀들의 그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그냥 벌집 같이 보이는 북쪽에 있는 243개의 동굴은 이곳에서 일하던 장인들과 승려들이 살던 굴이고, 계속해서 남쪽으로 만들어져 있는 500여개의 석굴 중 지금 남아 있는 492개의 석굴은 모두 불상과 벽화를 그려놓은 그리고 불경을 비롯하여 불교 유물을 보관했던 굴들이다.


이곳에는 총 735개의 굴이 있다. 이 굴들은 기원 전 366년 한나라 때부터 당나라 후기까지 천년동안 불심이 깊은 왕이나 왕족, 그리고 고관대작들이 크고 화려하게 만든 반면 가난한 사람은 작고 볼품없지만 정성을 다하여 만들었다. 불교가 가장 흥했고 통치기간이 길었던 당나라때에는 통틀어 492개의 굴 중 225개로 가장 많이 만들어졌고 수나라 때는 97개로 이 두 나라 통치 동안 모두 322개의 석굴이 만들어졌다. 명사산 동쪽 깎아지른 절벽에 만들어진 이 굴들은 약 1,600미터의 길이로 남에서 시작하여 북으로 연결되어 만들어져 있었다.

이 석굴 속에 그려져 있는 수많은 벽화를 1미터 높이로 잘라 계산을 할 때, 길이가 장장 45km나 되는 어마어마한 양의 벽화가 이 속에 있어 이를 일명 ‘벽화 예술의 화랑’(Mural Art Ccorridor)이라 부른다. 막고(Mogao)란 ‘나가지 말라’(do not exit)라는 뜻을 가졌으며 원래 수나라 때부터 있던 이 동네 막고의 이름을 따서 막고 굴이라 명명했다 한다.

366년 동네사람들이 기부한 돈을 가지고 승려 예중(Yue Zhun)이 동굴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 후부터 줄이어 많은 불심이 깊은 사람들이 굴을 만들고 벽화를 그리고 불상을 날랐으며 경전도 이곳에 보관하였다. 그러던 이곳이 송나라 말기 서하의 침입으로 불교가 쇄약해지며 이어서 몽고와 이슬람의 침입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불교가 흥성하던 막고는 사양의 길로 접어들며 세간의 관심 속에서 점점 사라져 점차 잊혀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사막의 건조함과 작열하는 태양빛, 아주 적은 강우량과 높은 수분 증발률 등, 이런 지리적·자연적 요건으로 인하여 석굴에 그려놓은 많은 벽화들은 옛 모습 그대로 보존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00년 초기 이곳 사원을 지키던 도교의 도사 왕원록(Wang Yaun Lu)이 청소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동굴 속의 불상이나 경전 등을 영국과 프랑스의 탐험가에게 넘겨준다.

신라의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 등 수많은 불경과 불상들의 80% 이상이 이렇게 외국으로 빠져나갔다고 한다.

이때 가져간 많은 유물들은 지금 영국의 도서관 및 대영 박물관과 파리의 박물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그 이후 중국의 문화혁명 때 또 다른 위기를 맞았지만 이곳을 관리하던 관리 저우 언 라이(Zhou En Lai)의 은밀한 보호 지시로 파괴되는 것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각 나라 말을 하는 안내원이 있어 자기 나라 말을 하는 안내원을 신청할 수 있으며 이들은 단지 이 석굴 안내만 한다. 입장권 하나를 사서 들어가면 10개의 석굴만 관람할 수 있다.

우리는 장경동이라 부르는 제17호와 16호굴을 시작으로 관람을 시작하였다. 퇴적된 황사를 청소하다가 발견되었다는 이 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16호는 이곳에 있는 가장 큰 동굴이며 천장에 사용단봉이 그려져 있고, 가운데는 석가모니 불상이 좌정되어 있으며 네 벽면에는 천불상이 그려져 있었다.


사용단봉이란 네 모서리에 그려져 있는 용과, 천장 한 가운데 그려져 있는 한 마리의 봉황을 뜻한다. 17호 굴에는 당나라 말기에 입적한 홍변 스님의 좌상이 그려져 있는데, 이 장 경동 속에 가장 많은 장서가 보관되어 있었고 왕오천축국전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 나라 말기 둔황의 고관 장씨가 만들었다는 94호 석굴, 그리고 높이가 35.5미터나 되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불상이 구층루 속 96호 동굴에 여기에 있는 불상은 유일하게 황제를 상징하는 용포를 입혀 놓았다. 148호 굴은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열반하는 부처님의 누워계시는 모습이 있다. 부처님의 길이는 약 15미터로 손 얼굴 발은 모두 금색으로 장식했다. 이 누워 있는 부처님의 모습은 라오스와 태국에서도 본 적이 있는데 이곳에 있는 것이 가장 아름다웠다.

237호 동굴에서는 티벳 여왕이 여러 나라에서 온 왕자들과 걸어가는 모습을 그린 벽화가 있는데 여기에 흥미롭게도 신라 화랑의 모자를 쓴 신라 왕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신라는 그때 벌써 승려뿐만 아니라 왕자까지 이 먼 타국으로 보내 외교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방에 있는 벽화는 둔황이 781년부터 848년까지 강성했던 티벳 지배 하에 있었을 때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259호 동굴에는 동방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미소를 띤 부처님이 입구 오른쪽에 있는데 이 사진은 유일하게 웃고 있는 부처의 얼굴로 막고 굴의 포스터 카드로 만들어져 사용되기도 한다.

당나라 초기인 1300년에 만든 328호 동굴은 가장 완벽하게 남아 있는 불상이 있으며 아직 한 번도 보수한 적이 없는 동굴이다. 424호 동굴은 가난한 백성이 만들었는지 아무 것도 없이 빈 공간만 있었고 그 옆에 있는 427호 동굴은 수나라 때 만든 동굴로 불상을 돌며 기도할 수 있게 만들었다. 428호 굴은 인도의 왕자 사취(Shattva) 태자의 ‘사신호’라고도 부르며 왕자가 어미 호랑이와 8마리의 새끼를 살리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한 이야기가 벽화에 그려져 있다.

또한 시주한 사람들의 얼굴들이 벽 아래에 그려져 있으며 이는 남북 조나라 때 만들었다 한다.

많은 관광객으로 인하여 훼손되는 것은 방지하는 장치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예를 들어 습기가 많아졌다면 그 동굴은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잠시 폐쇄한다고 한다. 그래서 한번에 10개 굴만 관람을 허용하여 최대한 훼손되는 것을 막아보려는 것이다.


동굴 안에서 천년이 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하나도 변하지 않은 불상과 벽화가 신비스럽다.

불교 유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막고 굴 입구. 총 500여개의 굴로 이루어져 있으며, 신라의 혜초 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도 이곳에 보관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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