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실제크기의 8천여 병마 ‘위풍당당’

2010-06-2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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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가 이형숙의 실크로드를 가다

▶ <3>놀라운 ‘병마용갱’

시안에서 14km 동쪽의 작은 마을
진시황 시절 어마어마한 사업 눈앞에
‘비림’‘대안탑’등 문화재의 진수 느껴


■ 병마용갱(Terracotta Warrior)

다시 발길을 돌려 20세기에 들어 가장 놀라운 고고학의 발견이라는 ‘진시황제의 병마용갱’(Terracotta Warrior)으로 향했다.


1974년 한 농부가 우물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한 이 ‘병마용갱’은 시안에서 14킬로미터 동쪽에 있는 링통(Ling Tong)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왕릉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뒤집고 그곳에서 약 1.5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진시황제의 능을 발견한 것은 뜻밖이었다.

현재 이 능의 봉분은 열지 않은 채 일부 한 부분만 열어놓고 중국의 고고학자들만이 조심스럽게 발굴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하늘 드높게 세워놓은 진시황제의 위풍당당한 동상은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을 환영하는 듯하였다.

20만 평방미터나 되는 대지에 자리 잡고 있는 이곳에서 발견된 5개의 병마용갱 중, 유물이 있었던 3개의 갱만을 1979년부터 관광객에게 개방하였다.
진시왕이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렇듯 자기의 사후를 위해 이토록 어마어마한 사업을 한 것일까?

이집트에서는 왕으로 즉위식을 올리는 그 즉시 자기가 묻힐 묘를 피라미드나 땅속에 시작한다고 하였는데, 동양에서는 ‘죽음’이라는 것을 멀리하고 자식들이 부모의 사후를 준비하는 관습이기에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원 전 264년 13살의 어린 나이로 보위를 물려받고 10년 동안 어머니와 각료들의 수렴청정을 받아 나약하게만 보여 왔던 진시왕. 그러던 그가 23살 되던 해 과감히 수렴청정을 끝내고 왕으로서의 권력을 장악, 주위의 나라들을 하나하나 정복해서 37세가 되던 해에는 벌써 7개국을 통합한 강한 군주로 변모했다.

그 후 그는 국호를 ‘진’으로 바꾸고 새로운 나라의 시작이라는 ‘시’, 그리고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황제라는 칭호를 써 왕이 아닌 ‘황제’를 붙여 “진시황”이 되었다.


그는 화폐를 만들었으며 문자와 더불어 법조문까지 만들어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

한편 몽고의 잦은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으며 자기의 사후 준비인 ‘병마용갱’을 만들었다. 황제는 늙고 병들어 죽을 것을 대비하기 위해 선남선녀 1,000명에게 불로초를 구해 오라고 동방으로 보냈건만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4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70만 인원을 동원해 37년에 걸쳐 만든 대 작품으로 가장 먼저 발굴된 1호 갱은 전체 넓이가 1만4,200 평방미터, 동서의 길이만도 230미터이며, 깊이 5미터, 너비 3m인 갱도가 11개나 있다.

그 갱속에는 마치 전장에 나가 싸울 준비가 되어있어 보이는 실제 사람 크기의 도자기로 만든 창과 검을 들고 있는 병정들, 마차들, 그리고 말들이 밖을 향해 일렬로 서 있었다.

얼굴 표정이 각기 다른 병정들 약 8,000명과 130대의 마차, 그리고 520마리의 말이 1호 갱 안에서 발견되어 그 중 일부만 전시되어 있다.

붉은 흙을 빚어 만든 군인들의 신발 바닥의 무늬에서부터 갑옷에 새겨진 무늬들은 마치 밀가루 반죽으로 만들어 놓은 듯 정교하였고 그들의 표정은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집트의 투탄카문(Tutankhamen)의 묘를 발견한 이후 최대 유적이라는 병마용갱이 세상의 태양과 공기 그리로 습기로 인해 붉은색이 회색으로 변하고 진흙이 부스러져 코나 팔이 떨어져 나가는 일이 생기자 관리에 더욱 신경을 씀은 물론 현재 더 이상의 발굴 작업마저 미루고 있는 실정이다.


■ 비림(Stone Tablet Museum)

한나라 때부터 청나라 때까지 약 900년 동안 묘비에 쓴 비석 1만1,000개를 소장하고, 약 3,000개만 시대별로 나누어 3개의 전시관에 진열하여 놓았다.

이곳에서 ‘왕휘지’나 ‘안진경’같은 당대에 내 놓으라는 훌륭한 문필가들이 직접 쓴 글 등이 전시되어 있어 마주할 수가 있다. 특히 이 글들을 탁본하는 곳에서는 글을 쓰는 것만큼이나 세심하게 탁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손님이 원하면 글의 탁본을 판매도 하는데 값이 만만하지 않다. 이곳에는 시안 고도 중심지에 있는 종루에 매 달렸던 실제 종을 보관하고 있다.


■ 대자은사와 대안탑
(Big Wild Goose Pagoda)

시안고도에서 남쪽으로 4km정도 가면 당나라 시대의 건축물 사이로 우뚝 쏟아 있는 대안 탑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이 그 유명한 대자은사이다.

당대의 왕 태종이 왕자로 있을 당시 불심이 깊은 어머니를 위해 현장 스님이 인도에서 가지고 온 많은 불상과 경전들을 보관할 수 있도록 지은 절이다.
현장은 이사원에서 12년이나 머물며 제자들과 함께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을 번역하는 대 작업을 하였고 사후 그의 몸에서 나온 사리도 바로 이 사원에 보관되어 있다.

현장법사는 중국의 소설가 오승은씨가 쓴 “서유기(Journey to West )”에서 원숭이 손오공, 돼지 저팔계, 그리고 사오정과 함께 수많은 역경을 무릅쓰고 서역, 지금의 인도로 가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우친다.

그리고 많은 불상과 경전을 가지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쓴 여행기에 나와 마치 소설 속에 주인공 같지만 실지로 있었던 고승이다.

이 절을 지을 당시 많은 승려들이 건축일에 참여 하였는데 너무나 배가 고파서 부처님에게 고기를 내려 줄 것을 빌었다고 한다. 그때 하늘을 날던 기러기가 땅에 뚝 떨어져 바로 그 자리에 탑을 세우고 이름을 대안 탑이라 명명했다.

1300년 동안 시안에 강진이 10여 차례 있었지만 이 탑은 견고하여 무너지지 않았으며 지금 이 탑속에는 많은 경전이 보관되어 있다.


병마용갱은 중국 역사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문화재 중 하나이다. 흙으로 만들었지만 실물과 똑같고, 얼굴 표정도 같은 것이 없다.

1,300년이란 긴 세월이 지났지만, 본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대안탑.

중국 최고의 문필가들의 필체를 느낄 수 있는 비림에서 관리자가 탁본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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