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황량한 고원, 자연과 나는 하나였다”

2010-03-0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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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한인산악회 티벳-네팔 횡단 등반기 <11>

■ 성자의 거주지 ‘시샤팡마’


8천m 이상의 14좌 중 가장 낮은 산
짐 나르며 젖과 고기 제공하는 블랙 야크는
티벳고원에 없어서는 안될 고마운 존재


티벳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꿈인 듯 몽롱하게 지나쳐 온 티벳의 고원은 시간의 개념을 흩어 놓았다. 그리운 얼굴들을 어제 봤던 것 같기도 하고, 아주 오래 못 본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의 실종으로, 거리의 모호함으로, 그리움은 그다지 사무치지가 않았다. 촉박한 시간도 감정의 흐름도 무시하고 싶을 때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것일까.


‘시샤팡마’를 들어가는 도로 입구에서 다시 여권 검사를 했다. 퍼밋과 통행료는 쌍둥이같이 늘 붙어 다니는 것이다. 8,000m급 산은 그 자체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소중한 자원이다. 중국이 티벳을 점령할 때 제일 탐낸 것이 시샤팡마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시샤팡마는 히말라야의 8,000미터급 14좌 중에서 가장 낮은 산으로 동쪽으로 순코시(Sunkosi) 강과 서족으로 트리술리(Trisuli) 강을 끼고 있는 랑탕-쥬갈 지역의 최고봉이다.

이 산은 8,000m급 봉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중국 국경 안에 위치한 관계로 14좌 중 가장 늦은 1964년에야 허륭 대장이 이끄는 중국 원정대에 의해 초등된 산이다. 산명은 티벳어로 ‘황량한 땅’ 즉, 기후가 나빠 작물과 가축이 살 수 없는 장소를 의미한다. 이 산을 네팔에서는 ‘고사인탄’(Gosainthan) 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카트만두에서 북쪽으로 50여킬로미터 떨어진 힌두 성지 ‘코사인쿤드’에서 비롯된 것이다.

코사인쿤드는 힌두어로 ‘성자의 거주지’를 의미한다. 시샤팡마는 티벳의 수도 라싸에서는 서쪽으로 무려 420킬로미터나 떨어진 반면에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는 북동쪽으로 불과 85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중국은 대륙의 공산화에 성공 후 최후의 8,000m급 산을 초등정하기 위해 1961년부터 3회의 정찰로 현재의 주 접근로인 북면 야북캉갈라 빙하를 통해 7,160m까지 도달한 후 1964년 왕부주 등 10명의 중국 산악인을 정상에 올리는데 성공했다. 정식 명칭은 티벳어로 “일기변화가 극심한 산”을 의미하는 ‘시샤팡마’(Shisha Pangma)로 통일, 사용된다. 1979년 중국이 외국 등반대에게 문호를 개방할 때까지 10년 이상 발길이 끊겼던 이 산은 개방 이래 현재까지 남북, 북벽, 서릉 등지에 6개의 새 루트가 개척되어 있다.

시샤팡마 베이스캠프에는 가을 시즌에 정상을 공략하려는 프랑스에서 온 팀이 있어 나름대로 붐볐다. 블랙 야크들도 멋진 몸매의 카리스마를 풍기며 카라반을 준비하고 있었다. 티벳 고원의 블랙 야크들은 참으로 티벳인들을 위하여 살신성인을 하고 있는 영물이다. 젖과 고기로 양식을 주고, 털은 옷으로, 야크버터로는 등불을 밝히고, 게다가 힘센 포터이면서 심지어는 그들의 분비물까지 땔감으로 유용하게 쓰이는 것이다. 야크를 볼 때면 감사함이 우러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전진기지를 구축하러 먼저 등반 하던 프랑스 대원 중 한 명이 추락해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고가 났다 한다. 나머지 대원들은 곧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 대원들과 사진도 찍고 우리 재미한인산악회의 동정도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반가운 셰르파도 만났다. 이름은 ‘파상 셰르파’였다. 한국 여성 최초로 8.000m급 이상 14좌를 등반하게 되는 오은선 대장을 증언해 줄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오은선 대장의 칸첸중가(8,598m) 등정 정상사진을 가지고 한 산악인이 의혹을 제기했다. 민감한 사항이니 만큼 자칫 큰 문제로 발전할 소지가 있었다. 한국의 중견 산악인인 신영철 대원이 파상 셰르파와 인터뷰를 했다. 파상은 오은선 대장과 비슷한 시기에 12좌째인 시샤팡마를 등정한, 스페인의 에두르네 파사반과 함께 한 셰르파다. 에두르네 파사반과 오은선 대장은 누가 여성 최초로 14좌를 먼저 등정하느냐로 각축을 벌이고 있는 사이이다. 파상 셰르파는 진심이 담긴 어조로 오은선 대장은 분명히 정상을 밟은 것으로 네팔 정부로부터 인증서를 받았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에서는 의혹을 제기했던 산악인이 사과기사를 게재해 모든 문제가 일단락됐고 오은선 대장은 3월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하면 14좌의 꿈을 이룸과 동시에 세계 여성 최초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우리 대원들은 시샤팡마 베이스캠프 언저리의 트레킹 허가를 어렵사리 받아냈다. 프랑스 팀의 카라반도 마침 시작되어 짐을 잔뜩 짊어진 블랙야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평선 뒤에 있는 시샤팡마를 향하여 모두 전진했다.

나는 방해받지 않는 텅 빈 마음의 상태가 되고 싶었다. 혼자 걷고 또 걸었다. 지평선 하나에 다다르니 그 너머에는 수많은 지평선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 시작했고 급기야 봇물이 터졌다. 천리만리 떨어진 황막한 고원에서 내 마음을 더욱 가깝고 확실하게 볼 수 있다는 것에 감동한 것이다. 자연과 신과 내가 교접되어 내 마음을 들여다 본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나는 그 곳에서 신을 느꼈다. 나를 이다지 눈물겹게 한 절대자가 분명히 있었다. 과연 시샤팡마는 ‘성자의 거주지’란 의미가 무색하지 않았다.

오후에는 텐진이 가이드를 하면서 눈 여겨 봤던 오지 마을을 방문하기로 했다. 미국에서 떠나기 전 대원들이 여러 가지 물품을 준비했다. 적당한 마을을 찾느라 차에 소중히 싣고 다녔다.

네팔로 가면 간식도 필요치 않을 것 같아 먹을 것의 대부분도 내려놓고 가려고 한다.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시냇물도 아슬아슬하게 건넜다. 마을은 변변히 농사지을 땅도 없는, 말 그대로 척박한 곳이었다. 이십여 가구 정도가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집집마다 깨끗한 카펫을 가지고 나와 마당에 깔아 우리를 앉게 하고, 따뜻한 차를 내왔다. 유순하고 초연한 영성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우리들에게 많은 행복을 주었다. 이곳을 지나가는 여행객들이 이 마을을 때때로 찾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마을을 떠나 얼마 되지 않아 포장도로가 시작됐다. 이제 병풍처럼 늘어선 히말라야를 감상할 수 있는 라룽라(5,200m)고개를 지난다. 마지막으로 고도가 높은 곳이다. 설산들이 우리를 환송하러 모두 나왔다. 우리가 만났던 초모랑마, 초오유, 시샤팡마가 꼭 다시 오라고, 무사히 잘 가라고 손짓한다. 국경도시 장무(2,300m)로 떠났다.

<수필가 정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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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샤팡마를 배경으로 산악회 회원들이 트레킹을 하고 있다. 시샤팡마는 8,000미터급 14좌 중 가장 낮지만, 중국 원정대에 의해 가장 나중에 정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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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크는 티벳인들에게 생활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젖과 육류를 공급하기 때문이다. 또 외국 원정대에게는 짐을 운반하는 교통수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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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샤팡마 등정을 준비 중인 프랑스 원정대와 산악회 회원들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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