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른아침 밥 짓는 냄새 “아, 고향 생각…”

2009-12-0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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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보 국토 종단기 <33> 고성읍에서 통일전망대로

눈을 떴다. 어디선가 익숙한 냄새가 흘러온다. 밥 짓는 냄새다. 복도를 지나 문틈으로 스며들어온 저 냄새. 어머니가 파를 송송 써느라 도마를 울리며, 무를 어슷 썰어 넣고 된장을 풀어 한소끔 끓어오르면 구수한 냄새가 집안에 가만가만 번지던 어릴 적 고향집 풍경이 떠오른다. 혀끝에 침이 돈다. 배낭을 메고 나와 해장국집을 찾는데 아침밥을 파는 식당이 없다. 빵집에 들러 빵 한 조각 커피 한 잔으로 대신했다. 오늘은 4월 초파일. 석가탄일이다. 오면서 들렀던 월정사와 낙산사에 걸려있던 그 많던 연등. 그 등에 담긴 소원들이 부처님의 영험으로 모두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길을 걸으며 낙산사 돌계단에 새겨있던 “길에서 길을 묻다”라는 화두를 다시 꺼낸다.


거진읍 마을에선 참전용사의 회한 들어주고
6.25 충혼탑에선 죽어간 병사들 넋을 위로


대대 삼거리에서 아기를 업고 있는 할머니에게 통일전망대 가는 길을 물었다. 걸어간다고 하자, “그 먼 길을 어찌께 걸어가느냐”며 놀라시더니, 전라도 땅 끝에서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말을 듣고는 “참말이냐”며 믿기지 않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신다.


장의차가 지나간다. 경찰차가 신호등을 깜박거리며 장의차를 선도한다. 미국처럼 경찰차가 장례행렬을 인도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길을 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일반인의 장례식은 경찰이 선도하지 않는다고 한다. 특별한 분이었나 싶다. 꽃상여 타고 상여꾼의 요령소리에 맞추어 고향 뒷산에 한 생을 묻던 아름답던 장례식은 이제 자취를 감추었다. 전통이 사라져가는 게 섭섭하지만, 관습이 뿌리를 내리면 그것이 또 전통이 된다. 사람이 태어나는 한, 장례식은 계속될 것이고, 죽은 자를 보내는 형식은 산 사람의 몫일 터.

통일전망대 27킬로 표지판이 보인다. 창조의 탑, 6.25 한국전 참전용사 공적비, 충혼탑이 나란히 세워져있다. 충혼탑에는 “전우여, 그대들 피로 물든 이곳에 마음의 표식을 세우노라. 1956년 9월 30일” 이라는 글이 새겨져있다. 한 뼘 땅을 지키기 위해 피 흘리며 싸웠던 격전의 현장, 그 어느 지역보다 치열했던 싸움터가 이 바로 지역이다. 땅 한 뼘 때문에 수많은 젊은이가 죽어갔다.

전쟁은 끝났지만 상처는 개별적으로 남았다. 거진읍 송죽리 앞을 지나는데 다리를 절룩이며 골목을 내려오던 분이 잠깐 쉬어가라고 팔을 잡는다. 사람이 그리운 분인가 싶어 그의 집으로 따라 들어갔다.

이북에서 내려와 16세에 군에 입대, 48년간 근무한 후 특무상사로 제대했다고 한다. 6년 전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쳤다. 전쟁은 물론 위험한 임무수행 중에도 상처하나 입지 않았는데 제대 후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사람 죽인 죄 값을 치루는 것 같다고 고개를 숙인다.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전쟁터. 죽은 자와 산자 모두에게 전쟁은 잔혹하다.

거진 삼거리에 도착. ‘동화 속 작은 마을 거진’이라는 안내판이 예쁘다. 해수욕장 앞에 ‘Ocean Sentevill Apt’라는 높은 건물이 서있다. 벌판에 바다 경치를 가로막고 서 있는 저 건물이 어떻게 허가가 나왔을까.

근처 텃밭에서 할머니 한 분이 비닐에 구멍을 뚫고 있다. 아흔 살이 내일 모래라고 하신다. 저렇게 큰 아파트가 바다를 가로막아 서있는데 갑갑하지 않으냐는 물음에 “사람 사는 곳에 사람이 많아져야제”라고 답하신다. 아들이 서울에 산다기에 나이를 물으니, “내 나이도 모르것는디 어찌께 아들 나이까지 다 챙겨”하며 웃으신다. 지붕이 헐었는데 아들한테 좀 고쳐달라고 하지 저렇게 놔 두냐고 하자, “아이고 그 사람 바쁜 사람이야요” 아들 변명하느라 애쓰신다. 할머니 한 분이 놀러오셨다. 아파트에 관해 같은 질문을 하자, “아이고 답답해, 아파트가 탱탱 비었어”라고 답한다. 한 동에 얼마나 하느냐고 물으니, “우리 같은 사람은 잘 몰라” 라고 손을 내저으신다.

거진은 명태의 고장이다. 항구에 명태잡이 배들이 정박해 있다. 밤에 배를 타고 나가 불을 켜놓고 명태를 잡는다. 집어등의 불빛을 보고 고기가 모여든다.


그런데 전등의 촉수가 높아 어부들의 눈과 피부를 많이 상하게 한단다. 잡은 명태는 할복장에서 배를 가른 다음 덕장에 메달아 말려 황태를 만든다. 황태는 간장해독, 숙취해소에 좋아 술꾼들이 즐겨 찾는다. 덕장은 하늘과 사람이 7대 3으로 동업을 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날씨가 중요하다. 이 마을 사람들은 날씨에 기대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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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태의 고장 거진을 알리는 안내판. 주변의 관광지 등을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예쁘게 디자인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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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포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김일성 별장. 일반인들도 실내를 돌아볼 수 있게 꾸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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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진항에 정박중인 명태잡이 어선들 옆에서 한 여성이 어망을 손질하고 있다. 이곳에서 잡은 명태 중 상당수는 내장을 제거한 뒤 덕장에 매달아 얼고 녹음을 반복하면서 황태로 다시 태어난다.

<정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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