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대포항의 짭짜름한 냄새 “아, 반갑다”

2009-11-2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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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찬열 도보국토종단기 <31> 속초를 지나며

잠에서 깨어 창문을 열었다. 바닷바람이 시원하다. 어제 저녁은 늦게 도착하여 주인이 안내해 준대로 그냥 방으로 들어왔었다. 밖에 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방이 열 개도 넘을 성싶은 꽤 큰 민박집이다. 그런데 손님이 거의 없다. 아드님이 신학대학 재학 중이고 아주머니 혼자 민박을 하며 살아간다고 들었다. 시즌이 아니라지만 어떻게 생활이 될까 은근히 걱정이 된다. 늦었지만 낙산사 쪽에서 자지 않고 이쪽으로 오기를 잘했다.


손님없는 민박집 숙박료, 2만원만 주세요
주인이 싸준 고구마에 배보다 마음이 불러
설악산 자락 곳곳 TV촬영장은 고장 명소로


짐을 꾸려 나오면서 아주머니께 방값을 물었다. 2만원이란다. 3만원을 드렸더니 만원을 돌려준다. 드리고 싶어 그러니 그냥 받으시라고 해도 막무가내다. 한동안 실랑이를 하다가 어렵게 쥐어드렸다. 인사를 하고 떠나려는데 잠깐만 기다리란다. 언제 싸 놓았는지 뜨끈뜨끈한 고구마 한 봉지와 떡 한 봉지에 물까지 넣어 한 보따리를 챙겨주신다.


시내버스를 타고 어제 떠났던 낙산사 앞까지 와서 다시 걷기 시작한다. 배낭이 제법 묵직하다. 불타버린 낙산사 뒷산, 시커멓게 타버린 나무둥치들이 보기에 짠하다. 부근에 ‘산불은 한 순간, 복구는 한 평생’이라는 표어가 붙어 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자는 격이다.

바다가 보이는 길가 바위에 앉아 고구마 한 개를 꺼내 먹었다. 아직 따뜻하다. 배보다 마음이 먼저 부르다. 집을 떠나면 먹고 자는 것이 걱정거리가 된다. 사람들은 여러 지방을 거쳐 가면서 그 고장의 특별한 음식이나 술맛을 보았냐고 묻곤 하지만, 몇 번의 경우를 빼면 음식의 전국화가 이루어졌는지 어디서나 맛이 비슷했다.

바닷바람이 부드럽다. 방파제 끝에 서있는 등대 너머로, 출렁거리는 파도를 타고 아침햇살이 물비늘로 반짝인다. ‘산에는 정기를 담으러 가고, 바다에는 깊은 슬픔을 던지러 간다’고 누군가 말했지만, 저 푸른 동해는 사람들의 슬픔을 모두 품어 안아줄 것만 같다.

모퉁이를 돌아서니 커다란 거북선 한 척이 나타난다. 거북선 옆구리에 ‘새 농어촌 건설’이라는 배너가 길게 걸려 있다. 동해바다에 거북선이라? 생경하고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저렇게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면 물건이건 사람이건 제대로 된 대접을 받기가 어렵다.

쌍천대교를 건너 속초시다. 대포항이라는 이름이 보이면서 짭쪼름한 냄새가 코를 훅 찌른다. 어느 곳이나 특유의 냄새가 있게 마련이다. 100여년 전 우리나라를 여행했던 서양인은 여행기에서 여관방에 배어 있는 마늘과 오물냄새, 그리고 메주 뜨는 냄새 때문에 속이 뒤집히려 했다고 한다. 방이 뜨거워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기록과 함께, 온돌방에서 땀에 흠뻑 젖으며 자는 한국인을 가리켜 밤에는 펄펄 끓는 방바닥 위에서 ‘빵처럼 구워지는’게 아주 익숙하게 되어 있다는 재미있는 표현도 있었다.

속초시청에 들렀다. 관광과 직원이 관광안내 지도를 건네면서 설악산을 자랑한다. 양양군에서는 대청봉과 한계령 오색주전골을 소개하더니, 여기는 흔들바위 비룡폭포 권금성 케이블카 등을 얘기한다. 설악이 여러 고을에 뻗쳐 있으니 서로 내 산이라고 자랑할 만하겠다. 설악처럼 ‘가을동화 촬영지’도 양양군과 속초시, 그리고 고성군 세 곳 모두 관광명소로 지도에 표기가 되어 있다. 세 장소를 오가며 촬영을 했는가 보다.

국토종단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완도의 장보고 촬영지나 제천의 태조 왕건 촬영지, 문경새재의 KBS 촬영장과 이곳 가을동화 촬영지처럼 영화 촬영지가 전국에 흩어져 있고, 촬영지는 예외 없이 그 지방의 관광명소로 지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부 지방에서는 촬영지를 유치하기 위해 공을 들인다는 소식도 들었다.


시청을 나와 고성 쪽으로 걷는다. 속초항이 보인다. 2003년에 금강산 구경을 가기 위해 들렀던 곳이다. 육로관광이 뚫리기 전에는 이 곳에서 배를 타고 금강산에 갔었으니까.

항구에 들어갔다. 외국인 노동자로 보이는 남자 셋이 그물 일을 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왔다는 라마디(26), 다윈(32), 리시(23)이다. 배를 타고 나가 고기 잡는 일을 3년째 한다고 했다. 배가 뜨지 않은 날은 허드렛일을 한다. 월급 88만원을 받는단다. 7년 전, 중국 연변에 갔을 때 조선족 아주머니의 월급이 100달러라던 말이 떠오른다.

라마디와 다윈은 아내가 보고 싶다고 했고, 리시는 미혼이다. 회사에 인도네시아인이 15명, 중국인은 30명도 넘는다고 했다. 돈 좀 모았냐는 물음에 “쪼끔”이라며 손가락으로 시늉을 한다. 명년에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 때, 라마디의 눈이 잠깐 빛났다.

내가 고향의 흙냄새를 그리워하듯, 저들도 그러할 터. 속초시청에서 받았던 치약, 칫솔 등이 들어 있는 선물세트, 그리고 배낭을 뒤져 몇 가지를 이들에게 나눠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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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에는 손 내밀면 닿을 듯한 고향을 그리며 살아가는 실향민이 많다. 그만큼 휴전선이 가까운 곳이다. 한 어민이 해군함정 옆에서 그물을 살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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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의 단풍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것이 기묘한 바위들과 잘 어우러져 한국의 가을 멋을 마음껏 발산한다. <속초시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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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외국인 노동자는 속초에도 많다. 월 80만원이 약간 넘는 봉급을 쪼개 가족에게 보낸단다.


정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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