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살·리·나·스, 혀끝 동글 말려오는 어감처럼…”

2009-11-2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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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마루 회원 박선옥씨 기행문

토요일 오전 7시, 정원을 빼곡히 채운 40인승 버스는 LA의 한인타운을 출발하여 살리나스(Salinas)로 향했다. 주최 측이 직접 대여한 그 버스 안의 풍경은 여타 관광을 염두에 둔 여행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글마루’의 회원인 김동찬 시인이 직접 가이드 역할을 맡았고, 편도 예닐곱 시간 중 많은 부분이 존 스타인벡과 그의 작품해설로 할애가 되었다. 스타인벡의 대표작인 ‘분노의 포도’ ‘에덴의 동쪽’ ‘통조림 공장 골목’ ‘달콤한 목요일’ ‘진주’ ‘생쥐와 인간’ 등, 여행에 앞서 작품을 나누어 읽었던 회원들이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도 막힘없는 작품해설을 이어갔다.

수많은 작품을 남겼고, 익히 머릿속에 기억되는 저명한 작가이지만, 막상 그의 작품을 몇이나 읽었던가. 고작 영화로, 미국 고등학교 권장도서로, ‘스타인벡’은 우리의 독서목록 중 변방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늦게나마 그의 심오한 문학세계를 발견한 우리는, 인간과 사회를 예리한 시각으로 다루는 주제 의식과 놀라운 문장력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스타인벡의 작품세계를 너울처럼 오가다, 문득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넓은 밭에서 드문드문 가을걷이를 하는 농부들이 보였다. 구부린 등 위로 소설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주드의 일가족이 겹쳐졌다. 터전을 잃어버린 유랑민이 절박하게 부여잡았던 젖줄, 예나 지금이나 땅은 피폐한 사람들에게 마지막 동아줄이다. 시대가 달라졌다지만, 생계를 잇기 위해 거친 숨을 들이쉬는 농부는 오늘도 땅 위에 허리를 숙이고 있다.

출발한 지 7시간쯤 지나 마침내 살리나스(Salinas)의 표지판이 보였다. “살·리·나·스” 지명을 가만히 읊조려보았다. 한 글자 한 글자에 스타인벡이 어려 있다. 혀끝에서 동그랗게 말려오는 어감위로 그를 향한 반가움이 살포시 솟았다.

‘존 스타인벡 센터’는 그의 생가에서 두 블럭 떨어진 곳에 있었다. 중앙 홀을 중심으로 스타인벡의 생애를 담은 영상물을 보여주는 영화관과 그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는 방, 그리고 작품 속 시대를 고스란히 재현한 방 등이 아담한 건물 안에 자리를 잡았다. 다큐멘터리 영상속의 스타인벡은 영화배우 버금가게 수려하며 동시에 이지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어린 시절을 거쳐 열정적으로 활동을 하던 시절, 말년에 노벨상 시상식에 나타난 그의 육성까지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우리는 이미 그의 작품 속에서 여러 차례 조우를 하였으니까.

개인적으로 이 여행에서 가장 아꼈던 장소에 들어섰다. 어릴 적 그가 몸을 뉘였던 싱글 침대, 초등학교 급우들과 찍은 사진, ‘1965년 1월25일’이라고 선명히 찍힌 그의 여권 등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는 곳.

오래 전에 그는 떠났지만, 바로 곁에서 숨 쉬고 있는 대문호를 경험하는 순간이다. 보다 안쪽으로 들어서자 트럭 한 대가 시선을 끌었다. 1960년 9월, 스타인벡의 나이 58세에 애견 찰리를 태우고 미국 34개 주, 소외된 뒷골목을 누볐다던 바로 그 차, ‘로시난테’(돈키호테의 애마 이름을 차용함)이다. 그 시기에 집필한 ‘찰리와 함께 한 여행’에서 의 한 구절을 옮겨본다.

“내 자신, 나의 나라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참된 미국의 언어를 듣지 못했고, 미국의 풀과 나무와 시궁창이 풍기는 진짜 냄새를 알지 못했고, 산과 물, 그리고 일광의 빛깔을 보지 못했다. 간단히 말해 알지도 못하는 것을 써온 셈이다. 이른 바 작가라면 그 일은 범죄에 해당될 것이다. 해서, 나의 눈으로 과연 이 거대한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직접 발견해 보리라 마음 먹었다.”


다음날 몬트레이를 관광했다.

스타인벡 작품 중 ‘통조림 공장 골목’과 ‘달콤한 목요일’의 무대가 되었던 ‘캐너리 로’(Cannery Row)에 이르자 짭짜름한 바다 냄새가 그의 숨결인 듯 살가웠다. 두 작품에 등장하는 몇몇 장소, 어분 창고와 매음굴, 그리고 해양생물연구소. 이 곳일까, 혹 저 곳이 아닐까. 건물의 모양과 거리를 가늠해 보는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사람들이다. 가을 태양을 빨아들이는 진공의 거리 한 복판에서 지나간 시간의 낮은 음률을 듣는 사람들이다.

‘뱃고동 소리만 들어도 온 몸이 쭈뼛쭈뼛해지고 발이 들썩거린다’고 한 스타인벡, 그의 흉상이 바다를 등지고 미로처럼 꼬부라져 사라진 골목길을 바라보고 있다.

버스가 그 유명한 17마일 드라이브로 접어들었다. 빼어난 골프코스 ‘페블비치’와 아름다운 저택을 끼고 구불구불 태평양 해안을 감아 도는 길이었다. 그 광경은 깔끔하고 날씬한 신사처럼 도도한 멋을 풍겼다. 하지만, 소박한 어촌의 냄새를 간직한 살리나스가 벌써 그리워지는 것은 어쩐 일일까.

카페 주소: cafe.daum.net/kulm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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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인벡 생가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글마루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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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의 유명 관광지 중 하나인 론 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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