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바다를 바라보는 의상대, 옛모습 그대로

2009-11-1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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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산사에 들다 - 도보 국토 종단기 <30>

양양대교를 건너면서 남대천 넓은 냇가를 바라본다. 연어가 저 물을 거슬러 올라오다니. 모천의 수온과 질감, 냄새를 잊지 못해서 돌아오는 것이 아닐까. 연어처럼 사람도 고향을 그린다. 자식들의 모천은 부모의 집이다.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람들은 고향집을 생각한다. 나를 반겨 맞아줄 산천과 사람,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장만하느라 바쁘실 어머니를 그리며 자식들은 고향을 향해 달려간다.

몇년 전 대화재로 불탄 나무들 상처 여전
미국에서 온 여행객들 ‘템플스테이’ 즐겨



길을 물어 양양군청에 들어섰다. ‘강원도 중심, 강원도 세상’ ‘변화의 새 시대 활기찬 양양건설’이라는 구호와 ‘해가 떠오르는 그림’이 청사 입구에 크게 걸려 있다. 그러고 보니 양양은 ‘해오름의 고장’이라는 의미다. 홍보과 전영진씨를 만나 양양군에 관한 여러 가지 안내를 받았다. 해마다 설날이면 “새해 해맞이 축제”가 열린다니 이름에 걸맞은 행사가 아닌가 싶다. 공동 모내기와 치어를 길러 연어를 방류하는 일을 비롯하여, 특산물 생산과 홍보, 그리고 관광사업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양양 성당을 찾아 갔는데, 문이 잠겨 있다. 사실 필자는 일요일에나 한 번씩 미사에 참석하는 주말 신자다. 그런데 국토종단을 하는 동안 성당이 있는 곳에는 들러 조배를 드리고 있다.

혼자 걸어가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것들과 얘기도 나누지만 나 자신과도 끊임없는 대화를 하게 된다. 살아오면서 상처 받았던 일, 내가 남에게 상처를 주었던 일을 비롯하여 온갖 일들이 떠오른다. 때로 기억 저 편에 울면서 서 있는 내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 나를 끌어내어 쓰다듬고 위로해 준다. 내가 나를 따뜻이 보듬어 위로하지 않으면 누가 그 일을 해 주겠는가.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것들, 걸으면서 묵상했던 일들을 절대자 앞에 무릎 꿇고 털어놓는다.

뒤쪽으로 돌아가 문을 두드리니 수녀님이 나와 본당 문을 열어주신다. 제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동안 몇 번의 위험한 일이 있었지만 별 탈 없이 여기까지 온 것이 아무래도 어떤 분의 보살핌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종단을 무사히 마칠 수 있기 위해서는 또 그 분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조배를 드리고 밖에 나와 잠깐 앉아 있는데, 자매님 몇 분이 성당에 들어온다. 레지오 활동을 마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낙산사를 둘러본 다음 여관에 들 예정인데 그 부근에 잘 아는 민박집이 있냐고 물었다.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예약을 해주며 전화번호를 적어준다. 이름이 ‘햇살맞이 민박’이다. 아드님이 신학대학에 다니는 교우 집인데 어머니가 민박집을 운영한다고 했다.

길가에 ‘송어와 연어의 고향 양양’이라고 쓴 커다란 선전물이 보인다. 해질 무렵 낙산사 입구에 도착했다. 외국인 십여명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Are you waiting for me?” 말을 건네자 모두들 반가워한다. 미국인 여행자들이 한국인 가이드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몇 마디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가이드가 도착해서 그들과 헤어져 낙산사 본찰을 향해 올라간다.


2005년 식목일에 발생한 화재로 인해 낙산사 주변은 불타버린 아름드리 나무들의 그루터기가 곳곳에 시커멓게 남아 있다. 그 사이사이에 어린 나무를 심어 놓았다. 건물 복원 공사는 80%정도 진척 되어 곧 완료 된다고 하지만, 나무가 자라 제법 숲다운 모습을 갖추려면 몇십 년은 지나야 할 성싶다.

의상대에 들렀다. 용케 화마를 피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어둠이 내리는 동해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자태가 한 마리 학이다.

외국인 모녀가 다가온다. 캐나다에서 왔다고 했다. 딸이 영어교사로 한국에 와 있는데 어머니가 방문을 와서 함께 낙산사에 머물며 3박4일 템플스테이를 하는 중이라 한다. 각 사찰에서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이 유행인 모양이다.

본찰로 올라가는 돌계단 위에 ‘길에서 길을 묻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글귀를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국토종단이 끝나는 날까지 이 화두 하나를 붙들고 씨름을 했다.

‘꿈이 이루어지는 길’이라는 푯말을 따라 걸어가니 ‘해수관음상’이 나온다. 어둠 속에 관음상이 우뚝하다. 키가 얼마나 될까. 관음상 주변에 촛불이 켜져 있고 몇 사람이 무언가를 빌면서 열심히 절을 하고 있다. 앞날을 알 수 없다는 게 인간에게 축복일지도 모르겠다.

아홉시가 넘어 민박집에 도착했다. 오늘은 성당도 절에도 들렀으니, 남은 일정은 두 분이 알아서 인도해주실 것만 같다.


<정찬열>


HSPACE=5

낙산사 의상대에 서면 신선이 따로 없다. 뒤에는 장엄한 설악이 버티고 있고, 앞에서 끝없는 동해의 푸른 물결에 모든 시름을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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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의 발걸음은 길을 따라 이어진다. 그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낙산사 돌계단에 새겨진 ‘길에서 길을 묻다’란 글귀가 그래서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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