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상 바라보기- 나의 시할아버지 이야기

2008-09-2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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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릉, 따르릉~
늦은 밤 전화벨 소리는 항상 가슴을 철렁이게 만든다. 꼭 나쁜 소식이어서가 아니라 적막을 깨고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언제나 낮보다 유난히 크게 들리는 듯해서이다. 며칠 전 그렇게 늦은 밤에 전화가 왔다. 시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나의 시할아버지께서는 97세로 장수를 하시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기억력과 시력, 청력이 좋으신 데다 가시기 전 날 당신은 무언가 아셨는지 자식들을 모두 불러 보시고, 그 날 밤에 주무시다 돌아가셨다 전해 들었다. 그렇게 호상이어서 모두들 할아버지 가시는 길에 슬퍼하지 말자고 말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에 커다란 나무가 쓰러진 듯 그렇게 기운이 빠졌다.

작년 한국에 방문했을 때 할아버지께서는 많이 쇠해 계셨다. 겨울에 미끄러운 계단에서 넘어지시는 바람에 거동이 급속도로 불편해지셨다고 전해 들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할아버지께서는 말이 없으시고 손자며느리인 나만 옆에서 종알종알 말도 하고, 할아버지 손도 잡았다.


솔직히 내게는 시할아버지에 대한 많은 추억은 없지만 딱 이맘 때 결혼한 나를 할아버지께서는 말없이 예뻐해 주셨다고 나는 늘 나 혼자 생각했다.

명절 때나, 제사 때마다 당신 며느리, 손자며느리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워도 언제나 당신 방에서 나오시지 않으셨던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를 나는 혼자 방에 계시니 외로우실 거라 생각하고 몰래 할아버지 방문을 빠끔히 열고 들어가 할아버지 손도 잡고, 이야기를 하다 나오곤 했었다. 처음 뵈어도 처음 뵌 분 같지 않았고, 할아버지 방에는 처음 뵈었을 때부터 작년까지 먼저 떠나보내신 할머니의 흑백 사진액자에 어버이날에나 볼 수 있는 가짜 꽃이 달려 있었다. 나는 보지는 못했지만 할머니 사진 액자에 꽃을 직접 다셨을 그런 할아버지 모습을 좋아했었다.

한 번은 내가 여쭈어 보았다. “할아버지께서는 왜 가족이 모이는 날에 혼자 방에 계세요? 나오셔서 말씀도 들려주시고, 저희가 하는 이야기도 들으세요.” 그렇게 할아버지 손을 끌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나이가 들면 말을 아끼고, 이이기를 들어도 못 들은 척하는 것이 자식에게 좋은 것이라며 조용히 미소 지으셨다. 그 말씀과 함께 항상 차분하시고 생각이 곧으신 할아버지가 나는 존경스러웠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소식을 들으니 갑자기 평생을 부지런히 일하신 덕분에 거치셨던 할아버지의 그 커다란 두 손이 생각났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할아버지의 손을 마주 잡았던 그 느낌도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면 할아버지께서는 늘 말이 없으셨지만 한 번도 뵙지 못한 시할머니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을 때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들뜬 모습으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다.

나는 안다. 할아버지는 늘 할머니 이야기를 하시면 신이 나 하셨다. 당신이 할머니와 결혼하시던 날의 모습을 내게 이야기 해 주셨던 그 순간만큼은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신 듯 갑자기 봄바람처럼 살랑이셨다.

나는 안다. 할아버지는 이야기꾼이셨던 할머니와 마주 이야기 하시는 것을 참 좋아하셨다. 그러고 보면 할아버지는 오랫동안 할머니와 마주 이야기 못하셔서 참 외로우셨을 것이라고 나는 항상 생각했는데 이번에 할아버지께서 할머니께로 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니 아마도 시할머니께서 할아버지를 마중 나오셨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영감, 어여 와. 내가 재미난 이야기 많이 해줄게.” 말씀하시면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한 번도 못 뵌 커다란 웃음을 하시고 할머니께로 달려가실 것 같이 느껴졌다.
할아버지, 행복하세요.

김정연 <화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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