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파나마 운하 탐험<2>

2008-09-1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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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찌든 가난 속에서 더 빛난 마야문명

파나마 운하  탐험<2>

멕시코 최남단에 있는 유명 관광지 후아툴코.

파나마 운하  탐험<2>

과테말라 앤티큐아에서는 관광객들이 삼륜차를 타고 도시를 돌아본다.

옛 수도 앤티큐아 곳곳 교회·조각 등 유적
동네 한 가운데 자리잡은 공동 빨래터 눈길

둘째 날(계속)
후아툴코의 관광상품은 시골탐방, 뉴타운 해변, 승마, 골프 등 10여가지가 있었다.

우리들은 멕시코 조상들이 살던 옛 시골 산타마리아라는 곳을 선택했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은 시골길이라 10명이 타는 밴 5대로 서로 인사를 나누며 관광이 시작됐다.


알로베라 농장, 그들이 살고 있는 집, 식물원, 교회 등을 둘러보고 톨띠아 만드는 과정도 보고 시식도 해봤다. 과일과 주스 비아그라 나무 등의 시음도 해보는 등 삶의 체험을 4시간 동안 했다.

이곳 뉴타운은 보지는 못했지만 멕시코 정부가 적극적으로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개발한 5번째 신흥도시와 항구로 곳곳에 36개의 백사장과 에덴동산처럼 꾸며진 힐과 크리스탈 같은 맑은 바닷물을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저녁 디너는 14층 부페와 4개의 식당 등에서 해결한다. 자유롭게 선택이 가능하다. 일부 식당의 경우 정장을 요구하기도 한다. 식사가 끝나고 매일 극장에서는 쇼가 열린다.

셋째날-푸에르토 퀘츠알
과테말라 푸에르토 퀘츠알 항구에 오전 9시 도착했다.
부두는 아주 작게 만들어져 있었다. 큰 배 한두 척이 겨우 정박할 수 있는 작은 항구와 예인선 2척의 활약이 대단했고 부두에는 28대의 버스가 우리들의 관광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이곳 역시 10여가지 상품이 있었는데 우리들은 옛 수도 앤티큐아를 선택했다.

과테말라는 BC 2600년부터 마야 문명을 갖고 있으며 AD 250년대에는 최고 번성기를 누렸다. 사원, 피라밋, 도서, 서재 등을 갖추며 자체 문화문명 언어를 사용했으나 1524년 스페인 정복자 페드로 알바라도에 의해 식민지로 변했고 금 은 커피 코코아 문화 등을 약탈 당했다. 1821년 독립을 했으나 오랜 내전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고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1986년에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된다. 수도는 과테말라시이며 전 인구 800만명. 옛 수도 앤티큐아는 1543년부터 1773년까지만 해도 인구 80만명으로 7개의 대학교 32개의 교회 등 최고 문화 도시였으나 1773년 대지진으로 인명 및 재산 피해로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지금은 인구 3만명의 소도시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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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질 듯한 집, 진흙 덩어리의 담 등 아직도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과테말라 주민들.

가는 길 양쪽에는 녹슨 양철지붕, 허물어질 것 같은 벽의 집들이 대부분이었고 시내에 들어와도 제대로 된 집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37개의 화산이 곳곳에 있는데 가끔 흰 연기를 뿜어내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고도시에 도착하고 보니 호화로운 옛 모습은 없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잘 보존된 조각들과 거리, 교회, 시청, 정원들 눈에 들어왔다. 물론 가난 때문인지 건물들은 관리부족으로 어둡고 초라했다.

삼륜차, 말마차, 택시기사 등이 호객을 하며 관광을 유혹했다. 나는 택시 주차장에서 마음씨 좋게 생긴 한 사람을 선택, 2시간에 20달러에 계약해 주위에 있는 관광명소들을 구경하기로 했지만 이 택시기사는 차를 타고 보니 영어라고는 ‘예스’와 ‘노’만 아는 것이었다.

히스패닉 종업원을 많이 두었던 나는 간단한 스패니시는 구사를 할 수 있다. 나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나서 대화가 통하자 내가 잘 하는 줄 알고 신이 났다. 흥겨운 과테말라 음악을 틀면서 열심히 명소들을 안내한다.
많은 가톨릭 교회와 수공예품 공장 그리고 공원 등을 돌아봤는데 특별히 인상적인 것은 빨래터였다. 동네 가운데 큰 저장통에 물을 받아 놓고는 곳곳에서 빨래터를 만들어 여러 명이 함께 세탁을 하는 공동 빨래터가 재미가 있었다.

폐허가 된 교회, 쓰러질 듯한 집, 진흙덩어리의 흩어진 담, 아직도 깜깜한 후세기에 살며 원주민들은 키도 작고 검은 얼굴에다 머리와 목이 딱 달라붙어 더 작아 보이는 민족이었다.

내 눈에 보인 그들의 삶이 비록 가난해 보였지만 많은 젊은 과테말라인들이 좀 더 좋은 삶을 위해 LA 한인타운 혹은 다른 지역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리고 우리가 6.25 이후 고생했던 생각을 하면서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우리를 안내해 준 운전기사 호세에게 감사하면서 택시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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