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상 바라보기

2008-06-1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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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상관없지만 가끔 궁금한 사람들

얼마 전 아침인가.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기 위하여 이른 아침 나선 나는 운전석 창문 너머로 짧은 커트 그레이머리에 두유 빛 흰 바지를 입고, 크레파스에 담긴 파란색처럼 새파란 남방을 걸친 60대 초반의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날씬하기보다는 적당한 나잇살에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한 모습으로 캘리포니아 애비뉴에 널려 있는 짧은 행단보도를 가로질러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그녀의 정면 얼굴을 보지도 못한 나이지만 만일 다음에 그녀를 마주치더라도 나는 그녀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며 나도 그녀와 같은 나이가 되어 머리가 은회색이 된다면 꼭 그녀처럼 파란 남방을 두유 빛 바지 위로 내 놓고 입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그 날 아침에 본 그녀는 나와는 아무 상관없지만 가끔 궁금한 네 번째 사람이 되었다.


시간이 먼 순서대로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11년 전에 그들을 만났다.

자정이 되어가는 파리 기차역, 기차 시간을 알아보러 남편이 간 사이에 나는 다섯 명이서 왔다 갔다 하는 중무장 된 군인들 무리 속에 한 동양인 군인과 눈이 계속 마주쳤다. 수줍지만 고백을 한다면 나는 그가 그리 멋질 수 없었다. 짧은 머리에 기다란 키, 적당히 그을린 피부, 냉정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따뜻해 보이는 것만 같은 눈빛. 나는 문이 닫힌 간이음식점 앞에 널려있는 한 의자에 빨간 배낭을 안고 앉아있었고, 그는 그 군인들 무리와 함께 왔다 갔다 하며 계속 나와 눈을 마주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그 늦은 시간에 서로 동양인이어서 더 눈이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나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와 눈이 마주칠 때 마치 이야기를 하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러며 혼자 생각했었다. 한국 사람일까? 일본 사람일까? 중국 사람일까? 그러며 말없이 그를 쳐다보는데 남편이 그에게로 다가가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와 무슨 이야기를 할까 하며 궁금해 했고 남편이 내게로 와 말해준 것은 그는 일본 사람이라고 했다.

남편도 그가 멋지게 보여 말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나와 남편은 자정이 넘은 파리 기차역을 그렇게 떠났다.

가끔은 나도 모르게 그가 궁금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도 가끔은 그의 안부가 궁금하다. 지금도 군인일까?

다음은 가장 오래되었다는 긴 목조다리가 있는 스위스 한 작은 도시에 떨어졌을 때 만난 여자가 나는 지금도 궁금하다. 너무할 정도로 한산한 기차역 일층에서 유리 전화 부스 속에 갇혀 보이는 듯한 50대로 보이는 옆모습이 여려보이던 그녀. 하늘하늘해보이던 빨강 시폰 블라우스를 시린 흰 바지 위로 빼어 입고, 나이가 든 금발 머리는 자연스럽게 뒤로 감아 말아 올린 그녀가 투명한 유리 건물로 이어진 기차역모습에서 붉은 점처럼 내 눈에, 내 기억에 박혔었다. 그녀가 전화하는 동안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그녀를 궁금해 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종종 그녀가 궁금하다. 그리고 그녀를 생각하면 지금도 그 날의 그녀모습처럼 가슴이 아리다. 왜 일까?

다음은 나의 치통으로 오스트리아 어느 도시에 있는 대학 치과병원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중 함께 앉아 있던 한 아가씨. 180센티는 되어 보이는 기다랗고 가녀린 그녀가 입고 있던 땅에 끌리던 겨자 빛 노란 원피스가 지금도 뭉개진 물감처럼 기억난다. 대기실에 있던 모두와 인사를 나누고, 지나가던 위생사와도 인사를 나누던 그녀는 이곳에서 낳고 자라서일까? 그렇게 궁금해 하며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녀의 앙상한 발가락들이 슬리퍼에 걸려 있다. 그러더니 이내 슬리퍼를 벗고 병원 복도를 맨발로 다니기 시작했다. 햇볕에 잘 단련되어진 그녀의 보기 좋은 다갈색 발.

정말 이상하다. 나와 아무 상관없지만 가끔 궁금한 그 사람들, 나는 지금도 가끔 그들이 궁금하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진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기억되어질까?

김정연
<화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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