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물 위에서 세월을 만나고 나를 만나다

2008-05-30 (금)
크게 작게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

1.‘스타프린세스’에 오르다

알래스카로 향하는 유람선 ‘스타 프린세스’의 객실(cabin) 입구엔 종종 오색 풍선이나 배너가 걸렸다. ‘Happy Birthday!’ 혹은 ‘Happy Anniver sary!’ 등이 쓰인 장식이다. 만찬장의 디너 테이블에서도 서브하는 이들과 손님들의 생일축하 노래가 어우러지기도 하였다. 대개가 그런 축하를 위해 크루즈 여행을 하는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지난 5월11일 떠난 알래스카 크루즈에는 한국인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이 있어서 200여명의 한국인들이 단체로 승선하였다. 팔순잔치 대신 크루즈를 하시는 분, 결혼 50주년을 기념하거나 은퇴기념으로 오시기도 하였다. 실제로 88세 미수(米壽) 축하를 받으신 어른도 계셨다.


아직 크루즈 연령 미달(?)인 우리 부부는 특별한 이유 없이 단지 세일기간이라는 연유로 덜컥 예약을 하였다. 자린고비의 모토로 살다보니 ‘정가 대로 돈을 다 치르지 않는다’가 가훈처럼 되었다. 파격적인 세일을 놓치면 손해 보는 기분이 드는 내외인지라, 큰 돈 쓰고는 마치 돈을 번듯한 기분이었다. 남편의 오랜 소원이 알래스카 여행이었으니 무턱대고 저지른 일은 아니었다.

계획하지 않았어도 한인 200여명 중에서 예상치 못한 반가운 이들을 만나는 것은 나만의 일이 아닌 듯 보였다. 우연히 학교 선배도 만나고 예전 교인도 만나고 수필교실의 아는 분도 만났다. 죄짓고 살 일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바로 적용이 되는 순간이었다.

타주에서 오신 분들도 한국에서 오신 분들도 계셨다. 처음 뵙지만 식당에서 자주 마주치면서, 이민선배나 인생선배의 살아오신 경험담을 들을 수 있었다. 어르신들께 ‘한 수’를 배우는 즐거움이 있었다.

사실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여행지에 가서도 풍광을 즐기기보다는 책을 보거나 누워서 빈둥대는 편이다. 그런 내겐 안성맞춤 여행이었다. 지루해서 읽기를 미뤄두었던 책들을 가져가 숙제하듯 읽었다.

그렇다고 7박8일 동안 계속 배 안에만 있지는 않았다. 항해를 하면서 저절로 펼쳐지는 경치를 탄성을 지르며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옵션으로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기회도 다 참여하였다. 배 밖으로 나가 토템마을의 장승도 보고, 빙하구경을 가기도 하고, 가파른 산을 오르는 기차도 탔고 박물관에도 갔다. 작은 타운을 거닐고 기념품 샤핑도 하였으며 케이블카를 타고 산 정상의 음식점에서 밥을 사 먹기도 하였다.

물론 옵션을 안 하고 배 안에 머무르시는 분들도 계시다. 몸이 불편하거나 여러 차례 오셔서 흥미가 없거나, 배 안의 이벤트에 관심이 더 많으신 분들이 그러하다.

배 밖으로 나가지 않는 분들을 위해 영화를 상영하기도 하고 식당은 늘 오픈이 되어 있다. 9홀의 미니 골프 레인지도 있고 피트니스 센터와 사우나도 있다. 배 안엔 상설 아트 갤러리가 오픈 되어 있는데 미술품을 구입하러 이 배를 13번 타신 분도 계셨다. 프린세스 크루즈 라인의 미술품 컬렉션은 유명하다고 한다.


시애틀 항구에서 출발하는 알래스카 크루즈를 택하였기에 엘에이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시택(SeaTac) 공항으로 갔다. 시애틀(Seattle)과 그 근교 도시인 타코마(Tacoma)의 앞 글자를 따서 시택이라고 한단다.
엘에이를 떠난 지 두시간반 만에 잠깐 만난 시애틀은 푸른 도시였다. 비가 부슬댄다는 소문과는 달리 날씨도 맑고 좋았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가 사는 동네가 시애틀의 벨뷰라고 했던가? 컴퓨터를 켜면 매일 만나는 윈도우즈 엑스피(아직 비스타는 아니지만). 그래서 시애틀이 더 반가웠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 아니라 시애틀을 보기위해 짐 싸느라 잠을 못 잔 엘에이의 밤이었다. 생전 처음 해보는 크루즈의 첫날이 시작 된 것이다.

공항에서 셔틀을 타고 항구로 갔다. 여권과 크레딧 카드를 내니 플래스틱 증명서를 하나 준다. 배에 들고 날 때의 신분확인증이자, 배 안에서 물건 구입할 때 현금 대신 쓰이게 되는 표이다. 현찰은 배 안에선 쓰지 않는다. 현금은 각자의 방에 작은 금고가 있으니 그 곳에 보관하였다가 뭍으로 외출 때 들고 나가면 된다.

수속에 오랜 시간이 걸렸고 길고 긴 터널을 걸어 배를 향해 꾸역꾸역 들어갈 때는 거대한 물고기의 뱃속으로 걸어가는 행진인 듯 보였다.

배에 드디어 당도하니 오후 2시께였다. 24시간 무료로 오픈된다는 14층의 부페식당에서 본전 생각하며 질세라 늦은 점심을 먹고 8층의 정해진 우리 방으로 가니 방 앞에 여행 가방 세 개가 어느새 당도해 있었다. 승객 2,700명에 1,300승무원이니 제복 입은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고 서비스도 빠르다.

방은 인사이드로 크지 않았다. 넓어 보이라고 한 면 벽은 거울이다. 작은 침대가 두개 놓여있다.

룸서비스에 부탁하면 두 침대를 붙여준다는데, 떨어진 채로 그냥 두기로 하였다. 방전 상태의 나이에 접어드니 전기(?)에 별로 신경 안 쓰인다.

<이정아씨>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