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상 바라보기- 나에게만큼은..

2008-05-2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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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만큼은 드라마는 다 거짓말이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에게도 드라마는 참 재미있다.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탄탄한 구성 덕분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는 그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완벽한 모습의 완벽한 언행으로 많은 여성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남자 배우가 열연을 하면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나도 모르게 그 남자 배우가 너무 마음에 들어버린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아줌마가 되니 젊고 아름답고 완벽히 관리된 예쁜 여자 배우가 나와도 반성은커녕 마냥 기분이 좋아진다.

언제나 최신 유행 옷을 입고, 완벽한 화장에 깔끔한 머리손질까지 하고 드라마 속 아내들은 요리를 한다. 게다가 순식간에 화면이 바뀌고 남편이 친구들을 데리고 떼로 들어와도 도대체 언제 차려진 것인지 늘어진 진수성찬 앞에 아내는 여전히 고추장 하나 안 튄 옷을 입고, 막 미장원에서 나온 모습으로 환히 웃고 있다. 설사 진수성찬을 차려 놓지 않았더라도 드라마 속 그녀들은 최소 막 피부 관리를 끝내고 나온 듯한 모습들이다. 뿐만 아니라 혼자 식사를 하더라도 드라마 속 그녀들은 동창회 모임에 나가기 직전에 옷차림을 하고서 손님이 와야 꺼낼 듯한 예쁜 그릇에 여러 가지 맛난 반찬을 두고 새 모이만큼 입에 넣고 오물거린다. 밥맛을 잃어버린 듯한 모습으로.


사실 결혼 전에 나는, 나도 드라마 속 그녀들처럼 그렇게 살고, 드라마 속 남자 배우의 대사들만 들으며 드라마처럼 살 줄 알았다. 헉, 그러나 이것은 나에게 만큼은 완전히 나의 교만이었다. 신혼 때 집들이로 남편과 친구들이 들이닥치는 날이면 나는 그 전전 날부터 장을 보고, 나르고, 요리계획을 세워 한 삼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고도 초대시간에 맞추기 위하여 나는 세수도 하지 못한 채 미친 듯이 작은 부엌에서 왔다갔다 하다보면 간신히 그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딩동~ 문을 연다. 잔머리가 귀찮아 묶어 올린 내 머리는 사또 앞에 끌려가 곤장 다섯 대는 맞은 듯한 상투머리가 되어 있고, 자세히 본다면 내 티셔츠에는 그 날의 메뉴들이 마구 튀어 있다.

어떨 때는 안경까지도. 그런 모습에 배시시 웃는 내 모습을 보고 그 당시 내 남편의 철없던 친구들은 “정연씨, 결혼생활이 벌써 힘드신가 봐요. 얼굴이 부었네.” 하고 거침없이 나의 여린 심장에 대못을 쾅쾅 박으며 해물탕을 한 그릇 더 달라고 이야기했었다. 와~ 진짜 드라마와는 너무도 다르다. 분명 드라마에는 예쁜 새댁들이 수줍게 못 이기는 척 일어나 노래도 하고 그러며 같이 놀던데 나는 남편의 친구들 수발들기 바빴다. 노래 가사까지 써서 주머니에 넣어두었었는데.

그리고 내게는 완전 무리인 드라마 속 혼자 먹는 식탁. 현실에 나는 오늘은 밖에 안 나갈 듯한 옷차림으로 설거지를 줄이기 위하여 있는 반찬을 한 접시에 줄줄이 담고 담대하게 우적우적 먹는다. 절대 드라마 속 그녀들처럼 내가 새 모이처럼 먹었다가는 하루를 무사히 버티지 못한다. 그러나 정말 이상하다. 결혼 전에는 분명 세끼를 굶고 빡빡한 스케줄로 돌아다녀도 거뜬했는데 몸집은 푸짐해졌어도 그 동안 속은 곯았나보다.

분명 결혼 전에는 나도 드라마처럼 살 줄 알았는데 결혼을 하고 나니 드라마를 볼 때마다 나와는 다르다는 것을 먼저 알아챈다. 그래도 잠을 자려고 누워도 화장을 하고 있고, 세수를 하고 나와 화장한 얼굴 위로 로션을 바르는 척하는 모습은 지금 봐도 우습다. 하긴 나 같은 사람이 드라마에 나오면 사실성은 있을지 몰라도 그 담당 PD는 드라마가 끝나기도 전에 시말서를 써야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거짓말 같은 드라마가 요즘은 더 재미있다.

김정연 <화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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