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상 바라보기- 슬픈 이야기이지만 늘 웃으며 듣는다

2008-04-2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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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재미나게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분이다. 아버지는 종종 식탁 앞에서, 산책을 하며, 어린 두 딸에게 또는 다 자란 두 딸에게 당신이 가장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가끔 돌려주셨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이야기를 가끔 들려주셨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아버지도 듣는 우리도 매번 그 시간이 그리 즐거울 수 없었다.

아버지는 특히 고등학교 시절에 나의 할아버지께서 하시던 일이 잘 안되어 가장 어려웠다고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그 당시 한참 먹을 나이에 도시락을 못싸가 수돗물로 허기를 달래었다고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그 슬픈 이야기를 하시면서도 배고플때 수도꼭지에 입을 이렇게 대고 물을 쉬지않고 먹으면 어떻게 배가 불러오는지에 대하여 아주 재미난 얼굴로 배를 볼록 내미시며 자세히 이야기를 하시면, 웃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우리 두 딸은 그만 배를 있는대로 내밀고 계신 아버지와 함께 깔깔대 있었다.

우리의 웃음에 신난 아버지는 지금도 만나고 있는 아주 재미난 친구의 이야기로 넘아가신다. 그 친구는 예전 명동에서 가장 큰 음식점을 하던 부잣집 아들로 항상 호화로운 도시락을 싸 가지고 오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었다고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부러워하지 않고 친구가 잠시 나간 틈을 타 언젠가부터 그 친구의 도시락을 몰래 훔쳐 먹기 시작했는데 여기서도 잠깐 아버지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시며 당신이 어떻게 먹지 않은 척 표 안나게 먹었는지에 대하여도 장황하게 설명해 주셨다.


그러며 처음에는 그 친구가 알게되면 많이 화를 낼 것이라 걱정을 했지만 너무 배가 고프고 너무 맛난 도시락을 보면 순간 당신도 모르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도시락 반이 없어져 있었다며 또 재미난 얼굴로 우리 두 딸을 보시면 우리도 아버지를 따라 그 슬픈 이야기에 웃고 말아버렸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늘 알고도 모르는 척하며 반이 빈 도시락을 살짝 열어보고는 길상아, 나 매점 가는데 혼자 먹으면 맛없으니 같이 가서 먹자하며 끝까지 알고도 모르는 척하며 매점에 데리고가 빵까지 사 주던 그이야기를 그리 자주 해 주셨다.

그 아버지 친구는 자존심 강했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가끔은 입맛이 없다며 먼저 도시락 좀 먹어달라고 부탁하고, 또 종종은 두개의 도시락을 가져와 나누어 주었다며 인생에서 가장 배고팠을 때 그 친구 덕분에 매번 명절이었다고 또 웃으시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 아버지의 친구 아저씨는 내가 미국 오기 전까지 종종 뵈었는데 항상 그 아저씨가 내게는 지금 이순간도 너무 감사한 분으로 느껴진다. 하여튼 우리 아버지에게는 배고팠던 이야기가 아주 많으시다.

그래도 가끔은 꽁보리밥에 오이지를 싸갈수 있었는데 그 오이지가 지금도 당신은 먹기 싫다며 그 오이지 이야기하실 때만 좀 슬픈 얼굴을 하신다. 그러며 가난한 티를 안내려고 풀먹인 하얀 교복의 깃을 어찌 세웠는지에 대하여 얼마나 열심히 설명해 주시는 지 공납금을 내지 못하여 결국에는 담임선생님께 불려갔을때 네가 못 사는 줄은 정말 몰랐다며 놀라시더라는 이야기를 하시며 또 웃으신다.

그 풀먹인 하얀 깃 덕분이라는 아버지 말씀에 우리 두딸은 또 따라 웃지만 감수성 많은 나의 고등학교 때를 생각하면 나의 아버지의 이야기는 분명 웃으며 듣기에는 슬픈이야기다. 그러면서 아버지꼐서 우리집 오실 때에는 될 수 있는대로 오이지 반찬을 안 내어야지 하고 결심했다.

그런데 지난 번 뵈니 어머니께서 고춧가루에 조물조물 무친 노란 오이지를 잘 드시는 것을 뵈니 아마도 다행히 그 슬픈 기억을 아버지의 입맛도 잊어버리셨나보다. 그래도 꽁보리밥에 오이지만 먹으면 맛없을 것 같다.

김정연 <화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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