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상 바라보기- 이상하게 맴도는 그 순간

2008-03-22 (토)
크게 작게
요즘 나의 머릿속에는 자기가 주인인 양 내 머릿속을 꽉 쥐고 들어찬 순간이 하나 있다.
이상하게도 별 제목도 없는 그 순간이 요즘 시도 때도 없이 나의 눈물을 쥐고 흔든다. 아무도 묻지 않은 그 순간을 무작정 그려본다면 이렇다. 지난 번 한국에 방문한 나는 어느 날 예정도 없이 엄마와 단둘이 다 늦은 저녁에 걷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전철을 타고 동대문 시장 구경을 간 적이 있다.
그 날을 기억해 보면 여느 때와 달리 나는 말 수가 적었고 잠시 땅 위로 나오자 한강다리 위의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본 기억과 내리기 전에 엄마와 동대문역에서 내릴지 동대문 운동장 역에서 내릴지에 대하여 작은 실랑이를 한 그 순간이 내 기억의 첫 부분이다. 물론 그 때 엄마보다 더 많은 전철을 이용했었던 내가 우겨 동대문역에서 내렸지만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동대문 운동장 역도 거기서 거기인 거리만큼 가까워 엄마도 맞았다. 그렇게 땅 위로 나와 보게 된 동대문의 밤거리는 언제나처럼 굉장히 낯익고 분주해 보였었다.
그런데 나오자마자 골판지에 쓰인 ‘현지직송’이라는 이름표가 달린 작은 트럭이 밤을 한 가득 이고 서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트럭이 요즘 그리 생각난다. 밤 한 되에 이 천 원. 밤을 좋아하는 엄마와 나는 그 작은 트럭 옆을 왔다갔다 하며 살까말까를 하다 나는 동대문 시장 구경을 하기도 전에 밤을 사서 들고 다니는 것은 좀 그렇다며, 아주 싸다며 사가자고 하신 엄마를 말렸었다.
그리고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엄마의 손가락이 말을 했다. “정연아, 청계천 다리 밑이 아주 예쁘게 변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인터넷에서 본 청계천 다리의 화려한 사진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정말 화려하네요.” 엄마의 말에 잠시 짧은 대답을 하며 또 걸었다. 그 날은 때 아니게 흩날리는 비도 잠시 내리다 멈췄다.
엄마를 따라 이곳저곳 다니다 엄마는 바지를 하나 고르셨고 나는 머리핀 하나를 골랐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 늦으면 안 된다며 다시 전철을 타러 걷기 시작했고 그 중간에 길거리에 놓인 상점 중에서 엄마는 역시나 지나치지 않고 옥수수 세 개가 들은 한 봉지를 사셨다. 그리고 우리는 집으로 가는 전철을 탔고 나는 두 개째 옥수수를 드시는 엄마 곁에 딱 달라붙어 앉았다. 엄마는 다시 한 번 옥수수 하나를 꺼내셔서 “정연아, 한 번 먹어봐라. 아주 맛있다” 하셨지만 별 생각 없던 나는 “저는 괜찮아요” 하고 웃으며 엄마를 바라보았는데 엄마는 “나. 우습지?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옥수수나 뜯어 먹고.” 멋적게 웃으시는 모습으로 내게 옥수수 먹는 자신을 대변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 날 부끄러워하시며 옥수수 먹던 엄마가 요즘 제일 그립다. 이상하게 정말 이상하게 그 날의 엄마가 그 순간이 내 머릿속에 박혀 버렸다.
그래서 한 참을 생각해 보았다. 왜 하필 그 날일까? 왜 그 날의 엄마가 자꾸 생각나는 것일까? 그랬더니 아마도 엄마와 단 둘이, 단 둘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막연히 짐작을 하게 되었다. 항상 삼총사인 엄마와 나와 동생. 그런데 그 날은 동생이 바빠 우리 둘만 다녀온 날이다. 동생이 태어난 이후로 늘 셋이었던 나는 엄마와 단 둘이 어디를 다녀온 그 길이 무의식에 그리 좋았나 보다는 짐작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나는 요즘 겉모습은 서른 중반 아줌마이지만 하루에도 열 두 번 옥수수 먹던 울 엄마가 보고 싶어 눈물이 왈칵왈칵 쏟아진다. ‘그 때 엄마가 밤을 사자고 하셨을 때 밤을 샀어야 했는데’ 하며 자꾸 눈물이 난다. 제목도 없던 그 날이 자꾸 생각이 나고, 참고 있는 울음이 터질까 전화로는 차마 말을 못 꺼내지만 요즘 나는 엄마가 보고싶어 미치겠다. 아마도 그 때 밤을 안사서 벌 받는 것 같다. 게다가 현지직송이었는데 말이다.

김정연
<화가·칼럼니스트>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