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녀의 손끝에 세상이 바뀌다

2008-03-0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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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손끝에 세상이 바뀌다

제이콥스 엔지니어링에서 학비는 물론 책값, 주차비까지 전액 지원해 대학원을 졸업한 방진희씨는 2007년 오렌지카운티 여성 교통 세미나(WTS) 장학생으로 선정됐다

그녀의 손끝에 세상이 바뀌다

세계 최대 건설업체 중의 하나인 제이콥스 엔지니어링 그룹에서 선임 교량 엔지니어로 일하는 방진희씨가 푸른 하늘만큼 눈부신 미소를 짓고 있다.

설계 8년차… 글로벌 기업 제이콥스 엔지니어링홍일점 교량 선임기술자
현 리버사이드 Fwy 교통체증 해소 프로젝트 맡아… 큰 설계만 15개 완공

교량 설계 8년차 방진희씨는 선임 교량 기술자(senior bridge engineer)다. 현재 그녀가 진행하는 프로젝트 중 하나가 리버사이드 프리웨이 91번과 215번, 15번, 79번이 관통하는 32마일 구간의 교통체증 해소책인 미드 카운티 팍웨이(MCP)다.
리버사이드 인구가 몇 배로 증가하는 2035년을 내다본 프로젝트로, 건설한 도로와 다리 주변에 캐년이 많아 리서치에 리서치를 거듭해야 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토목 중에서도 구조공학에 깊은 관심이 갑니다. 다리나 프리웨이 같은 구조물 디자인은 빌딩보다 스케일이 크고 예산도 많이 들죠. 고도의 기술과 다이내믹한 팀웍이 요구되는 프로젝트이기도 합니다. 기간도 1년에서 1년 반 정도 소요되다 보니,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가 세밀해지고 나름대로 배우는 게 상당히 많아요. 특히 캘리포니아는 지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내진설계가 필요합니다. 교량의 내진설계는 엔지니어가 된 이후 매우 흥미를 갖는 분야에요.”
그녀를 만나니 언젠가 스쳐갔던 ‘여성 엔지니어들은 아름답다’는 책 제목이 떠올랐다. 여성 엔지니어는 부드럽게, 때로는 격렬하게 일해야 한다고 했던가. 100파운드 넘을까 싶은 가냘픈 체구에 안경 너머로 살짝 드러나는 눈웃음이 예쁘기 그지없는 그녀다. 첫인상만으론 도대체 이 여자의 어디를 봐서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대규모 교량 프로젝트를 맡기는 걸까 싶었다. 그러나 1시간가량 인터뷰를 하면서 치밀한 준비와 저돌적인 추진력을 지닌 그녀의 부드러운 카리스마에 완전히 반해 버렸다.
그녀가 몸담고 있는 제이콥스 엔지니어링그룹(Jacobs Engineering Group)은 1947년 설립된 이후 미국 건설업계 3위에 속하는 산업, 상업, 공공건설업체로 패사디나에 본부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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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컨설팅 엔지니어 앤 랜드 서베이어즈(CELSOC)로부터 엔지니어 엑셀런스 어워드를 수상한 방진희씨가 설계에 참여한 퍼시픽 코스트 하이웨이 입체교차로.

공사판 속 정장도 내 모습


재난복구 전문회사, 항공우주플랜트부문 주요 협력업체 등의 명성을 지녔고, 전 세계 20개국에 160여개 사무소를 둔 글로벌 기업. 그녀가 근무하는 캘리포니아 사이프레스 사무소는 프리웨이와 교량 등 공공 토목공사를 비롯해 카슨 정유소와 화학, 의학시설 등을 건설하는 직원 700명 규모의 회사이다.
70명의 엔지니어들이 일하는 사무실에 여자는 그녀를 포함해 3명. UC 샌디에고 토목학과와 칼 스테이트 롱비치 대학원에서 구조공학을 전공할 때부터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생존하는 법을 터득했기에 ‘나는 여자니까’라는 전제는 그녀의 사전에 아예 없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고 1970년대부터 동남아 교량, 터널 건설현장을 휘젓던 아버지 이성준씨를 보고 자랐기에 분석과 계산이 주 업무인 엔지니어 세계를 즐긴다.
“교량이나 도로 프로젝트 수주를 위한 프리젠테이션에 나서면, 클라이언트들 모두 고개를 갸우뚱해요. 나이 어린 동양 여자, 그것도 남성적인 구석이라곤 전혀 없는 연약한 모습이 제 인상이잖아요. 반면에 클라이언트들은 주로 캘트랜(CalTrans), 메트로 교통본부(MTA) 같은 주정부나 시정부 교통관리국 간부급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항상 이미지 관리에 신경을 쓰는 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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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모니터 속에도 책상 위도 설계도면 밖에는 없는 그녀의 사무실.

그녀는 딱딱한 분위기의 비즈니스 룩을 즐겨 입는다. 사실 엔지니어 세계에서 정장 차림을 만나긴 힘들다. 데이터와 숫자로 승부하는 세계에서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는 건 당연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좀 다르다. 나이 어린 동양 여자가 아니라 냉철한 기술자라는 인상을 주고 싶어 한다. 그렇다고 자신의 여성성을 숨기고 싶은 생각도 없다. 남들 눈에 띄는 프로 엔지니어, 게다가 사교성이 뛰어난 여자라는 장점을 최대한 활용해 파티나 중요한 미팅이 생기면 상사들이 데려가고 싶은 엔지니어 1순위로 꼽힌다.
“자연스럽고 유연하게 여성이 지닌 특유의 능력을 발휘하면 그것이 바로 경쟁력인 사회 아닌가요? 엔지니어들은 대화 기술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요. 실제로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고위직으로 올라가면 마케팅이나 정치학 전공자들이 많죠. 대화 기술이 부족해 고위직에 엔지니어가 없다면 누가 엔지니어의 입장을 대변하겠어요?”
냉철하고 차갑게만 보이는 엔지니어가 아니라 타인의 감성을 살피고 관계를 중시하는 엔지니어가 되고 싶다는 그녀. 대학시절 캘트랜(CalTrans)의 인턴으로 현장 경험을 쌓을 때부터 90년 전통의 엔지니어링업체 HDR를 거쳐 제이콥스 엔지니어링으로 옮긴 이후 대규모 교량 설계 프로젝트만 15개를 완공했다. LA공항에 가도 비행기보다 교량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는 그녀가 있어 여성 엔지니어가 중심에 서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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