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서 새터전 일군 미주 청년들의 성공 스토리

2008-01-2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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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 새터전 일군  미주 청년들의 성공 스토리

LG 필립스 설창윤 과장이 LG 사이언스 센터 내 설치된 플라즈마 TV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눈치 문화’ 적응 안돼도 “난, 한국인”
LG 필립스 LCD 법조팀 설창윤 과장

오후 들어서면서 여의도는 제법 날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아이의 얼굴을 닮아, 조만간 눈발이 흩날리지 싶었다. 그리고 정말 5호선 여의나루에서 하차해 지상으로 올라오는 순간, 거짓말처럼 탐스런 눈송이들이 거리로, 나뭇가지로, 행인들의 어깨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적당히 붉은 하늘, 적당히 노을에 물든 구름, 적당히 움츠린 거리의 사람들이 서울 도심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그날의 서울은. 그 행복한 눈 내리는 풍경을 배경으로 한 LG 트윈타워에서 설창윤(34) 과장을 만났다.

초등학교 5학년때 도미 아이오와 법대 졸업
연대 대학원 인연 시카고 잘 나가던 변호사 접고 서울행
교통지옥 겪으며 마음껏 뛰놀던 푸른 공원 생각 솔솔


#미국남자, 서울에 정착하다  
한국에 온지 이제 겨우 반년정도인데 그 어디서도 ‘미국 물’ 냄새가 나질 않는다. 설명하기 쉽진 않지만 미국에서 간 2세들에게선 한국 남자 혹은 여자들과 확실히 다른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나 미국에서 왔는데요’라고 이마에 써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확연하게 ‘서울 사람’들과 다른 그 무엇이 외모에서부터 풍겨 나온다. 그러나 사람 좋은 웃음과 서글서글한 눈매에 단정하게 빚어 넘긴 머리카락에서 도저히 반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잘 나가는 변호사로 살아온 이력이 전혀 감지되질 않는다. 그에게선.
“그렇게 보이는 게 서울에서 사는데 도움이 되겠죠?(웃음) 다들 저를 미국 교포로 안 보시더라고요. 여기서 나고 자라고 교육받은 전형적인 한국 남자로 봅니다. 대학 졸업 후 연대 국제대학원에서 MBA 과정을 밟은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도 딱 보통의 서울 남자처럼 생겼다고 하더군요.(웃음)”
초등학교 5학년 때 도미, 미국에서 아이오와 법대를 졸업하고 시카고 로펌에서 일하던 그가 서울행을 결심한 것은 지난해 5월. 연대 국제대학원 시절 경험이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1.5세로서 서울에서 제대로 일해보고 생활해 보고 싶었던 오랜 희망이 그를 이곳으로 끌고 온 것이기도 하다.
“별 문제없이 학교를 다니고 대학을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을 갖긴 했지만 1.5세로, 이민자로 미국에서 뼛속같이 동화되고 적응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아마 무의식적으론 제 마음속 뿌리 한 켠은 한국을 향하고 있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대기업서 서울을 배우다
그래서 지난해 5월 그는 서울에서 한번 제대로 살아보기로 결정하고 당시 갓 태어난 딸과 아내를 이끌고 서울행을 결심했다. 게다가 처가가 한국에 있어서 이주를 결심하기는 더 쉬웠다.
현재 LG 필립스 LCD 법조팀에서 그의 업무는 상법 관련이 주다.
“새로운 계약을 맺을 때마다 그 건을 검토하는 등 해외 수출입 관련 법률문제가 제 주된 업무입니다. 또 그때그때 현지 변호사들과 연락해 문제를 정리하고 해결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죠.”
그러나 업무도 업무지만 결코 만만치 않을 한국 대기업에서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겐 다이내믹한 서울이, 조직이, 사람들이 흥미진진하고 즐거워 보였다.
“구내 식당에만 가도 맛있는 음식들을 많이 먹을 수 있죠. 게다가 요 몇 달간 제가 밥값을 내본 적이 없어요. 선배들이 후배들 밥 사주는 문화가 당연시 돼 있어서 말이죠. 서울이라는 독특한 공간에서 또 그만큼이나 독특한 조직문화를 배워가고 있는 중입니다.”

#쉽지 않은 문화, 그래도 난 한국인
물론 아무리 한국문화를 잘 이해한다고 자부하는 그이지만 한국 대기업 생활이 결코 녹록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조직이라는 곳이 결코 쉬운 곳은 아니죠. 지금 한국 기업은 예전에 비해 하루가 다르게 변화 발전하고 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보고서 문화라든가, 회의가 유난히 많은 것은 현실입니다. 게다가 상명하달식 조직문화라든가 ‘눈치 문화’ 같은 것은 아직 적응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고요.”
간단명료했지만 그의 고민의 지점이 얼핏 묻어나는 대목이다.
“그래도 한국어와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어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는 가장 뿌듯하고 행복합니다. 아, 그리고 제 사무실이 트윈타워 18층인데 한강이 한눈에 조망됩니다. 근무환경도 저로서는 아주 만족스런 부분이기도 합니다.(웃음)”
심각함과 적절한 유머를 오가는 이 남자, 짧고 짧은 단문으로만 묻는 말에 답하는 듯 하지만 행간행간 꽤 길고도 긴 이야기를 들려줬다.

#푸르른 공원과 치즈케익 그리워
어디 힘들고 적응해야 하는 것이 업무뿐일까. 서울 생활은 1.5세 미국 남자에게는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지 않는가.
상상을 초월하는 비싼 집 값, 짜증 날 만큼 무지막지한 출근길 전쟁,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오염된 공기는 이 1.5세 ‘미국 남자’에게는 다 극복의 대상이다.
“얼마 전 결혼기념일을 맞아 큰맘먹고 양평에 간다고 나섰는데 평소 같으면 1시간 걸릴 길이었는데 자그마치 4시간 30분을 길에서 버렸습니다. 그 뒤론 주말에 차 끌고 여행은 고사하고 어디 나갈 엄두가 안 나더군요.”
살인적인 교통지옥 외에도 가끔 그의 마음은 대책 없이 시카고 집 근방을 헤맬 때가 있다.
“가족들이 주말 오후 한 때 마음껏 뛰놀 수 있는 푸른 공원이 문득문득 그리워 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맛있는 치즈케익과 파스타가 생각날 땐 더더욱 절실합니다.(웃음)”
몇 년 뒤 그가 이룬 꿈은, 그를 밀고간 소망은 어떤 얼굴로 그의 옆에 서 있을까. 적어도 메이드 인 USA 치즈케익보다는 훨씬 더 달콤하고 행복한 맛이 아닐까.

<글·사진 이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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