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생각하는 삶- 여성 리더십 시대의 도래

2007-06-30 (토)
크게 작게
얼마 전 LA타임스 기사에는 한 미국인 여기자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스타벅스 커피샵에서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미국 스타일의 커피 잔을 들고 감동하며, 커피샵 가죽의자에 앉았을 때 주인이 다가와 “그 곳에는 여자가 앉을 수 없다”며 안쪽에 있는 아동/여성 전용실을 이용할 것을 요구, 아연실색을 하고 말았다는 경험을 쓴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이처럼 아직도 이슬람 국가에서는 여성을 ‘차도르’와 ‘히잡’으로 감싸두며, 그 모습을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은 물론 사회 활동을 법으로 금지하는 곳이 많다.
물론 그 미국인 여기자도 차도르와 히잡을 착용하고 있었다.
불행히도 여성이 양성평등의 원칙에 의하여 동등한 대우와 권리를 법적·관습적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직도 보편화돼 있지 않다.
필자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인류문화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 여성의 남성예속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이 가정과 사회를 지키는 수동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지구촌 각지에서 동등한 권리를 행사하며,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발전에 참여할 수 있을 때 세계의 문화와 문명이 한 차원이 높아지는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통해 볼 때, 고대에서는 여성이 부정을 탄다고 생각했고,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믿어, 중세 때의 어거스틴과 아퀴나스 같은 학자들조차 “여성에게도 영혼이 있는가”라며 토론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직도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여성들을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수녀와 비구니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서도, 유교의 영향으로 ‘삼종지도’‘칠거지악’등으로 남존여비의 규범들이 여성을 압박해 왔으며, 그 제도들이 장자우대와 남녀차별 재산상속에 이어졌고, 여전히 우리의 머리에는 구시대의 관습에 뿌리를 둔 잠재의식이 남아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여성의 남성종속화 또는 남성이 여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가장 잘 나타내어지는 것이 가정 폭력이다.
아직도 많은 남성들은 여성이 소유물이고 전유물이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물건이라 생각하고 있음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여성들은 여성의 권리가 예전부터 법적으로 존중되어 진 것인 양 잊고 살고 있으나, 여성의 참정권(선거원, 대선거권 등)이 허락된 것이 이제 겨우 100년이다.
놀랍게도 세계에서 최초로 여성에게 피선거권을 인정한 나라는 핀란드다.
1906년의 피선거권부여로 1907년 19명의 여성이 의회에 진출했고, 100년이 지난 2007년 현재 여성 대통령에 여성장관이 60%를 차지하는 내각을 조성하고 있다.
이밖에 1893년 뉴질랜드, 1902년 호주가 선거권만을 여성에게 주어줬고, 영국도 1928년에야 남녀평등의 참정권이 이뤄졌으며 미국은 그보다 8년 빠른 1920년, 프랑스는 1944년, 한국은 1948년에 이뤄졌다.
여성 참정권이 100년에서부터 50년, 그리고 아직도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은 나라들을 생각하면, 여성의 폭력과 빈곤,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서 벗어날 때가 언제가 될지 심히 염려스럽다.
하지만 동시에 세계는 변하고 있어 현재 10여개국의 수반이 여성이다. 그리고 통쾌(?)한 일은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 출마후보로 출마한 여성들이 선거 캠페인에서 선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특정후보를 선호해서가 아니라 나는 여성이 대통령이 되어 리더십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화합과 통합, 그렇게 하여 새 에너지 창출로 인류문명에 새 옷을 입히고, 새 정신을 부여할 수 있는 그런 리더십으로 말이다.

로라 전
<전 건강정보센터 소장>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