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상 바라보기 - 내 친구는 정말 오로라 공주였을지도 몰라

2007-05-1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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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2학년때 일이다. 살랑이는 11월의 어느 수업시간에 나는 아주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때 내 짝꿍은 키가 작고, 짧은 파마머리에 약간 통통한 친구였는데 어느 수업시간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정연아, 나는 실은 오로라 공주야.” 그 순간 나는 오로라 공주라는 말에 너무 놀라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지 당황하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던 멋진 주인공들이 나오는 만화영화 ‘오로라 공주’의 주인공이 내 친구라니. 정말 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내 짝꿍은 만화 속 오로라 공주와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그 만화는 손오공 이야기를 바탕으로 원숭이인 손오공 대신 잘 생기고 유머 있는 남자로, 사오정은 마른 체격에 분위기 있는 남자로 저팔계는 몸집은 있지만 자상한 남자로 묘사되어 있었고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오로라 공주는 하늘하늘한 자태에 긴 머리와 우아한 말투로 그 당시 모든 여자아이들의 우상이었다.
그런데. 내 친구가 오로라 공주라니. 아무리 보아도 내 짝꿍의 모습은 오로라 공주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수업임을 잊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쏟아지는 질문을 하였다. 그 대답에 내 친구는 자기가 공주임을 알아볼까봐 이런 모습으로 변장하고 다니며 우주의 하루는 이곳에 1분이며 그래서 자기는 마음껏 우주에서 살다 이곳에 온다고 하였다. 게다가 자기는 손오공과 사귀고 있다고 말했고, 마침 오늘 저녁 6시에 우주선이 우리 아파트 놀이터에 내려온다고 했다. 오로라 공주인 내 친구를 데리러.
그렇게 나는 엄청난 사실에 놀라고 있는데 갑자기 그 친구가 내게 제안을 했다. 우주선은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데 오늘 네가 자기와 함께 우주로 가기를 원한다면 내 눈에도 우주선이 보이게 해 주고, 함께 우주에 같이 갔다 오자고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비밀로 해야 한다고 했다. 그 동안 너무 크나큰 사실에 놀라 있던 나는 그 제안에 너무 감사하며 내 친구에게 말했다. “고마워~미애야. 나도 가고 싶어. 그런데 나는 사오정을 만나고 싶은데 그럴 수 있을까?”라고 묻자 내 짝꿍은 당연하다며 예쁜 웃을 입고 오라고 했었다.
그렇게 그 날의 수업은 모두 가슴 떨림으로 우주로 날아가 버렸고, 나는 오직 어떤 옷을 입고, 우주선을 탈까 하는 생각에 벌써 마음은 만나기로 한 저녁 6시에 가 있었다. 짝꿍과 놀이터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는 집에 돌아와 숙제를 하고, 세수도 하고, 아끼는 커버 양말도 신고, 여름 원피스도 꺼내었다. 쌀쌀한 11월이지만 나는 꼭 이 여름 원피스를 입고 가고 싶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친구가 준비하라는 비상 물품을 책가방에 넣고, 그렇게 나는 저녁 6시에 드디어 놀이터에 갔다. 물론 친구도 나온다고 했으니 이제 나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놀이터 벤치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쌀쌀한 11월의 저녁 6시에. 추위를 잘 타는 나이지만 상관없었다. 내 친구는 오로라 공주이고, 나는 우주선을 타고 사오정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마냥 신이 났었다.
그러나 나오기로 한 오로라 공주인 내 친구는 나오지도 않고, 우주선도 절대 놀이터에 착륙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무슨 사정이 있을 거야. 조금만 기다리면 올 거야 하고. 한참을 기다리는데 퇴근하시는 아빠가 놀이터에 여름 원피스를 입고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시고 부르셨다.
왜 친구가 안 나왔을까 사정이 있다면 집도 가까운데 와서 사정을 알려주지. 야속했다. 친구가 야속하고, 오로라 공주가 야속하고, 사오정을 못 보게 되어 너무너무 아쉬웠다. 나는 그렇게 잠을 설치고 다음 날 아침 그 친구 집에 일찍이 찾아갔다.
딩동~ 친구가 “누구세요?” 하며 문을 열며 나의 뾰로통한 모습을 보자 놀랐다. 그리고 나는 왜 안 나왔냐며 따져 물었다. 많이 기다렸다고 이야기도 하고. 언제 우주선이 다시 오냐고도 물었다. 정말 너무너무 화가 나서 물었다. 그렇게 따져 묻는데 내 친구의 입에서 오로라 공주라고 이야기했던 그 처음처럼 놀라운 소리를 듣게 되었다. ‘정연아, 실은 나 오로라 공주 아니야. 내가 지어낸 이야기야.” 헉. 망연자실한 초등학교 2학년 나. 거의 실신할 뻔 했다. 그리고 울먹이며 말했다. 너무한다고. 그 때 내 짝꿍 아빠가 나오셨고, 울고 있는 나를 보자 자초지종을 물으셨고 나는 이제까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또 눈물이 났다. 그렇게 다 이야기를 들으시고 내 친구 아빠는 아주 진지하게 내게 딸 대신에 사과를 하시겠다고 했다. 친구 아버지께서 사과를 하시니 더 따질 수도 없고 나는 기운 없이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왔다. 그 때 나는 망연자실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게 되었고, 며칠을 속상해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내 친구는 정말 오로라 공주였을지도 모른다. 비밀이 새어나갈까 봐 내게 그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우주의 지령을 받고서.

김정연 <화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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