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 지붕 25년 산 시어머니와 며느리

2007-05-12 (토)
크게 작게
권옥엽·염선희씨

“조금씩 양보하면 만사 OK”

한 지붕 아래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은, 그 자체로 수도다.
부모 자식 간의 연이라 해도 한지붕 아래 동거는 각자의 입장때문에 또 각자만의 이유로 고달프다.
단 하루라도 못 보면 죽을 것 같아 부부의 연을 맺는 순간 시작되는 한 지붕 동거 역시 말 그대로 애와 증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엇갈리는 관계가 아니던가.
그러면서 우리는 이 팍팍한 일상에서 수도자처럼 관계를 회복하고, 상처를 치유하고, 사랑에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 간다.
물론 깨달음 사이 간간이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다투기도 하고 미워도 하고 증오도 하면서. 그런데 이 한 지붕아래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있는 풍경은 어떨까.
우리네 전통 가족 형태에선 그리 낯선 구조도 아니지만 지금 한국이나 미국이나 보기 드문 풍경인 것만은 확실하다.
더욱이 이곳에서 자고 나란 신세대들에겐‘경악’할만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여기 한 지붕 아래 사반세기를 알콩달콩 살아온 고부가 있다. 결혼과 동시에
시어머니 권옥엽(80)씨와 함께 일상을 공유해온 엄선희(52)씨.
귀밑머리 고운 이십대에 시집을 와 이제 결혼할 당시 시모의 나이가 돼 버린 그녀.
함께 늙어간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시간이 돼 버렸지만 이 두 여자의 일상은 여전히 유쾌하고 상쾌했다.


자식에게 바라는 보상심리 접고
친구처럼 서로 의지하니 평온해져

HSPACE=5

<시어머니와 며느리라기보다는 모녀지간이 아닐까 싶을 만큼 서로를 닮아가고 챙겨주는 권옥엽(오른쪽), 엄선희씨가 환하게 웃고 있다>

■비결요? 조금씩 양보하는 거죠

여자들끼리의 동거는 제 3자의 입장에선 듣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숨 막힌다. 고교시절 괴담도 대부분 질시와 원한에 얽힌 여고괴담이지 남고괴담이란 단어조합은 못 들어본 듯 하다. 여대생들 기숙사는 또 어떤가. 역시 팽팽한 긴장과 얽히고설킨 ‘피 튀는’ 관계가 난무하는 결코 만만한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자들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런데 이 시어머니와 며느리 한 지붕에서 25년을 살았단다. 같이 안 살아도 ‘시어머니 괴담’과 ‘신세대 며느리 괴담’이 난무하는 요즘, 도대체 비결이 뭐냐는 질문에 이들은 오히려 질문이 생뚱맞다는 표정이다.
“처음엔 당연히 힘들죠. 남편과 맞춰 사는 것도 힘든데 시어머니와의 관계 맺기가 쉽지 않죠. 그래서 시집온 날부터 조금씩 저를 버리고 양보하기로 했어요.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을 양보해 어머니와 함께 있고, 샤핑도 함께 하면서 친구가 되는 거죠.”
스물여덟 되던 해에 한살 연상인 남편 엄창웅(54)씨를 만나 열애 끝 결혼에 이른 선희씨는 결혼과 동시에 시어머니 권씨와 함께 살았다.
괄괄하고 화끈해 보이는 시어머니와 조용하고 수줍음 많은 새댁의 동거는 언뜻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둘 다 자신이 손에 쥔 것, 고집하는 것들, 누려야 할 것들을 조금씩만 양보하다 보니 관계가 훨씬 편해졌다는 것이 이들의 비결 아닌 비결이다.

“시어머니 내조에 감사할 뿐”

일하는 며느리 대신 손자·손녀 셋 키워
친정엄마처럼 따르니 얼굴 붉힐 일 없어

■며느리가 말하는 시어머니
별로 말수가 없는 며느리는 묻는 질문에 한 문장을 넘기는 법이 없다. 그래도 25년 동안 활달한 시어머니와 사느라 그나마 성격이 많이 사교적(?)으로 변한 거란다.
“처음엔 적응이 안됐죠. 친정어머니도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신혼 초엔 너무 다른 분위기에 적응하느라 힘들었어요. 뭐라고 할까 갑자기 주변이 막 시끄러워졌다고 할까요(웃음). 그래도 이젠 저도 맞장구도 칠 줄 알게 됐고 사교적으로 변해서 엄씨 집안사람 다 됐죠.”
그러나 무엇보다 시어머니에게 가장 감사한 것은 일하는 며느리를 200% 이해하면서 삼남매를 갓난아기때부터 지금까지 키워준 것이다.
선희씨는 현재 롱비치 소재 LA 카운티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데 정확한 타이틀은 N.P(nurse practitioner). 의사와 간호사의 중간쯤이라고 설명하는 이 타이틀은 의사처럼 환자를 보고 처방전도 쓸 수 있는 일반인들에겐 조금 생소한 직업이다.
“쉽지 않은 일이죠. 결혼하고도 대학원 공부하느라 육아나 집안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공부하고 바깥 일 할 수 있도록 집안 살림해 주시고 아이들고등학교때도 픽업해 주고 먹여주시고 했어요. 덕분에 지금까지도 열심히 일할 수 있었고요”
그리고 선희씨가 어머니에게 가장 감사한 것은 남편보다는 며느리편이라는 확신을 들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속상하게 하면 어머니에게 다 일러요. 그럼 어머니가 팔 걷어붙이시고 나서서 해결해 주죠. 이런 시어머니가 어디 있겠어요?”
그뿐 아니다. 시어머니랑 한 집에 살면 부부싸움은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고부는 마주 보고 웃는다.
“아예 싸워야 될 것 같은 날은 어머니에게 미리 예고를 합니다. 어머니 오늘 저희 싸웁니다 하고요. 2층에서 큰소리 나도 이해해 주세요 하고 아예 예고를 합니다. 그러니까 함께 산다고 눈치보고 편 가르고 할 일이 없는 거 같아요.”
인터뷰 전부터 한사코 신문에 날 만한 별다른 이야기가 없다며 손사래 치던 선희씨. 일견 평범한 듯 해보이지만 결혼해 사는 이들이라면 결코 일상에서 실천하기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알 터. 평범한 행복의 비법을 이미 안 그녀는 이미 큰 도를 깨닫는 데 성공한게 아닐까.


HSPACE=5

<2004년 동양선교교회에서 수여한 장한 어머니상을 받은 뒤 권옥엽씨와 며느리 엄선희씨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우리 며늘애 같은 사람 없죠. 노인네 거추장스러우니까 혼자 다니라고 해도 샤핑이며 피트니스 센터며 같이 다니자고 할 정도니. 겉으론 손사래 치지만 속으론 너무 좋죠. 날 친구로 친정 엄마로 생각하며 따르는데 싫다고 할 시어머니가 어디 있겠어요?”
다른 어느 손자보다 첫 손자가 사랑스럽다는 할머니, 작은 며느리보다는 큰 며느리인 선희씨가 100배는 더 예쁘다고 단숨에 후다닥 털어놓을 만큼 거침이 없이 솔직담백한 시어머니의 며느리 사랑은 거짓이나 ‘립서비스’는 아닌게 확실해 보인다.
“싫으면 제 성격으론 하루도 같이 못삽니다. 25년을 함께 살았다는 건 그만큼 우리 며느리가 심성 착하고 곱다는 거죠. 그리고 무엇보다 시집와 아들 딸 낳고 살아준 것만도 고맙죠.”
이렇게 화통하고 통 큰 이 시어머니는 그래서 2004년 동양선교교회에서 수여하는 장한 어머니 상을 받기도 했다.
홀시어머니와 맏며느리의 이 보기 드문 ‘쿨’한 동거는 무엇보다 자식들에게 무언가를 받아야 한다는 보상심리가 없는데서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어휴, 자기네들끼리 잘 살면 되지 뭘 더 바라요. 아들 며느리 관계 질투하는 시어머니도 있다고들 하기도 하던데 둘이 알콩달콩 잘 살아주는 것이 효도죠 별 거 있나요?”

남편 흉볼 땐 고부가 짝짜궁

■남편, 고부간 진실을 털어놓다

이 남자, 팔불출 맞다.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선희씨를 ‘천사’라 소개하는 이 남자가 팔불출이 아니면 누가 팔불출일까.
25년을 어머니와 즐겁게 살아온 아내가 대견하다 못해 예뻐서 어쩔 줄 모를 만큼 아내 사랑이 유난하다. 아니 아내 자랑이 유난하다.
“쉽지 않은 일이죠. 지금껏 어머니 잘 모시고 살아준 것만도 감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머니에게 아내는 친구이자 자매 같은 존재입니다. 정말이지 장가 잘 간 거 맞아요.(웃음)”
쉰이 넘은 사내가 아내 자랑을 침 튀겨가며 하는 것도 우리네 정서로는 신기한 일이지만 그런 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보는 어머니 권씨까지 보통 집안은 아닌 것이 분명해 보인다.
“어머니가 성격이 직선적이셔서 사실 쉬운 분은 아니세요. 좋고 싫음이 분명하셔서 낯가림이 심하고 내성적인 아내가 잘 적응할까 걱정했는데 웬 걸요. 제가 잘못하면 의기투합해서 절 혼내줄 정도죠. 이만하면 고부가 아니라 친정어머니와 딸 수준이죠.”
아무래도 그는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남편이자 아들이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아는 엄씨 집안 최고의 고수가 아닐까 싶다.

HSPACE=5

<남편과 아내가 아니라 오누이가 아닐까, 고부가 아니라 모녀간이 아닐까 싶을 만큼 이들 가족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알콩달콩 즐겁다. 오른쪽이 남편 엄창웅씨>

글 이주현 기자·사진 이승관 기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