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부동산 일기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2007-02-2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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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주 카팔루아(Kapalua) 공항에 내려서자 환하게 트인 시야에 햇살 받아 반짝이는 바다의 물결이 눈부시도록 하얗게 부서지며 밀려왔다. 청포를 풀어 놓은 듯 검푸른 빛깔의 바닷물 저편에 초승달처럼 엷게 뻗은 산호초 군락이 무공해 섬 마우이(Maui)를 상징하며 떠 있다. 하와이에서 경비행기로 1시간 남짓 날아온 언덕 위의 공항에서 나는 한참 동안 눈앞의 경관에 취해 넋을 잃고 서 있었다.
따끈한 태양빛은 바람에 씻겨 어깨에서 등을 타고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내렸다. 자연의 순박한 고백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며 목덜미를 끌어안는다. 바닷가 최적의 드라이버 코스로 일컬어지는 ‘황금의 6마일’ 도로를 따라 달리니 흰색 리무진 창밖으로 푸른빛 풍경화가 펼쳐진다. 세계적인 골퍼 아놀드 파머가 설계한 카팔루아 골프 클럽과 PGA 투어가 열리는 카아나팔리(Kaanapali) 골프 코스가 태평양을 배경으로 누워있다.
라하이나(Lahaina) 항구에는 관광 어촌의 멋과 맛이 묻어 나왔다. 짐을 풀어 놓고 해가 질 무렵에는 어김없이 바다를 뛰었다. 서편으로 넘어가는 노을을 눈으로 밟으면 어느새 땅거미가 더운 황토를 식히며 발목 아래를 넘어간다. 바다의 송가가 멀리서 가까이서 들리고 나는 끝도 없이 긴 바닷길을 밤이 깊도록 한 마리 말처럼 뛰어 달렸다. 달리기 코스가 끝난 카나팔리 비치 리조트의 잔디밭에 누웠다.
깊은 호흡으로 먼 하늘 창공을 마신다. 상큼한 대기를 마신다. 해변 마당에는 어느새 어둠이 깔리고 하늘엔 별만 무성히 떴다. 쏟아질 듯 떨어지는 별들의 파티. 별 헤는 밤-. 별 실은 파도가 모래성에 잠입해 든다. 우리가 구워대던 바베큐 연기는 온 하늘에 아우성이 되고 추억이 되어 피어오른다. 밤새 들리는 파도 소리에 꿈은 소라에 잠기고 해초에 감겨 깊은 바다를 헤엄치는구나.
그토록 아름다운 바닷길 입구에 그림 은 나의 가게가 있었다. 이름 여 라하이나 일스킨(Eel Skin). 대륙붕 바닥에 서식하므로 수압에 견디느라 단단하고 질기며 부드러운 감촉이 미국 여성들의 손끝을 매혹한다는 곰장어 가죽의 원조. 지갑 핸드백 명품만을 팔던 꿈의 터전이 있었다. 탁월한 로케이션에 렌트도 무난했고 가게 운영도 재미 붙일 만큼 원만했다. 알토란같은 길목에서 나오는 매상에 하와이 로컬 시장의 전체 섬 도매까지 합치면 금새 사업 청사진이 나왔고 몇 년 더 노력하면 바로 성공의 고지가 보이는 판국이었다.
그 꿈의 상점을 뒤로 하고 내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실패와 참담한 아픔을 씹으며 어느 날 나는 돌아서야 했다. 뒤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동업 파트너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배신감을 삼키며 나는 공항을 떠났다. 멀리 보이는 간판 위로 그간 쌓아온 사업의 탑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다만 언덕 위 카팔루아 공항의 관제탑에서 격려사가 들려왔을 뿐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니”
내 젊은 날 최초의 패배를 교훈으로 가르친 곳. 훗날 나의 가정이 조각나는 원인을 제공한 죄의 땅. 그로 인해 두고두고 각성의 채찍을 맞으며 아픔을 안은 채 짊어져야 했던 질곡의 삶. 이제 십년 세월이 흘러 그 시절의 상처와 흔적은 마음 한 켠에 남았으나 어찌하랴. 눈을 감고 더듬어 보면 그리 하여도 다시 찾아가고 싶은 곳, 그 곳이 마우이의 카팔루아 언덕인 것을.(213)590-5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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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하 <윈 부동산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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