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주현 기자의 ‘트렌드 따라 잡기’

2007-02-1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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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는 즐거워

시인 장석남의 독백처럼 ‘이제는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의 이민 연차를 쌓고, 기형도의 시구처럼 ‘잘 있거라,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라는 인사말쯤은 웃으면서 할 수 있을 만큼의 나이를 먹어버렸고 ‘함부로 길을 나서/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라는 시인 이문재의 고해성사도 벌써벌써 해버렸건만 생은 여전히 뫼비우스의 띠처럼 제자리걸음이다.
출구를 보여주지 않는 건지, 정말 답이 없는 건지, 그 조차 아니면 산에 올라 가부좌 틀고 죽비 맞아가며 면벽수도라도 해야 하는 건지 해탈은 고사하고 지천명의 깨달음조차 요원하다. 뭐 말은 이렇게 거창하게 하지만 결국 답답한 건 거창한 생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일상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그리고 다시 내일은 어제와 같을 게 확실시되는 일상이 황망하고, 요원하고, 무감각하고 기대 없어지는 게 아닐까.
그래서 우리에겐 짬짬이 일탈이 필요하고 이벤트가 필요하다면 너무 천박해 보이려나. 그렇다고 먹고사는 일 뒤로 내팽개쳐 두고, 옛날 시골동네마다 한 명씩은 꼭 있다는 ‘머리에 꽃 꽂은’ 여자처럼 시시때때로 일탈을 감행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러나 바야흐로 밸런타인스 데이가 아니었던가. 일본 백화점의 상술에 놀아난다는 둥, 진심은 사라지고 샤핑만 넘쳐 난다는 둥 그런 케케묵은 혹은 진 빼는, 그래서 하나마나한 논쟁은 접자. 그저 일상에서. 잠시 일탈할 핑계가 생겼다고 치면 어떤가. 아무 날 아무 시에 우리가 언제 그렇게 살갑게 남편에게, 아내에게 초컬릿 한 점 선물 할 수 있을까.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들이 아닌 이상 우리가 언제 한번 정겹게 사랑한다는 말 한 자락 건넬 수 있겠는가.
혹시나 이번 밸런타인스에 남편이(아내가) 혹은 남자친구(여자친구)가 멋진 파티 참석을 통보해서 벌써부터 들떠 있을 커플은 그 페이스대로 즐거운 이벤트를 기다리면 되고 그렇지 않은 이들, 결코 기죽을 필요 없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까. 이벤트는 만들면 된다. 파티라는 단어가 거창하게 들리지 않게 된지도 오래되지 않았던가. 따라서 거창한 파티 렌탈 업체를 부르거나 케이터링을 예약할 필요도 없다. 그저 칵테일 혹은 트렌디한 맥주 몇 병 차가운 얼음 채운 버켓에 꽂아 넣고 카나페나 그도 아니면 스낵 몇 점 예쁜 접시에 담아 친구들 불러 먹고 마시면 바로 그 자리가 파티가 아니겠는가. 그래도 밸런타인스 데이니까 드레스 코드나 작은 선물교환 이벤트 정도는 준비하는 것도 센스 있어 보인다. 그리고 만약 얼마 전 뭐에 홀린 듯 사놓은 섹시한 시폰 칵테일 드레스가 있다면 때는 바로 이때다. 그 드레스와 같은 색상이나 패브릭을 드레스 코드로 정하는 것이다. 이때가 아니고선 언제 이런 ‘남세스러운’ 드레스를 입어 볼 날이 있겠는가.
파티는 그저 즐기면 되는 것이다. 부담과 형식에서 벗어난 아주 자유로운 파티를 이번 밸런타인스 데이에 도전해 보자. 트렌드는 따라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때론 이끌어가는 맛도 있어야 하니까.

HSPACE=5

<로베르토 카발리의 핫핑크 실크 칵테일 드레스. 도발적인 컬러와 디자인이 이번 밸런타인스 데이 컨셉 의상으로는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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