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상처한지 5년 박상유씨 ‘싱글 아빠’ 스토리

2007-01-2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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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한지  5년  박상유씨  ‘싱글 아빠’ 스토리

남자 살림답지 않게 깨끗하고 정리정돈 된 부엌이 싱글 대디 5년간의 노하우를 말해준다. 이제 저녁은 늘 따뜻한 한식으로 차려낼 만큼의 경지(?)에 올랐다는 박상유씨가 환하게 웃고 있다.

상처한지  5년  박상유씨  ‘싱글 아빠’ 스토리

아내와 사별하기 직전 한국 여행 때 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

“귀동냥 부엌일 이젠 아내역 척척”

뇌출혈로 간 아내 빈자리 너무 커 아들 붙잡고 울기도 수차례
정신 다잡고 교회 집사·권사들에 요리법 익혀 집안 살림 시작

어디 세상사 곡절없는 이들이 어디 있겠는가. 살아온 이야기 소설로 엮을라치면 상중하 3권은 족히 나오는 것이 대부분의 인생사지만 ‘홀아비 아들 키우는 이야기’만 할까. 주류사회든 한인사회든 갈수록 늘어나는 이혼으로 ‘싱글 맘’이 늘고 있지만 싱글 대디는 주변에서 찾아보기 쉽지는 않다. 이혼을 해도 ‘자녀 양육은 엄마’라는 우리식 정서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 혹은 엄마의 죽음으로 이들 부자에게는 양육권이고 뭐고 선택의 여지가 없다. 죽음이라는 불가항력 앞에 지상에 덜렁 남겨진 남편과 아들. 좋든 싫든, 원하든 원치 안든 이들의 동거는 시작됐다. 5년 전 뇌출혈로 아내를 잃고 아들 샘(16)과 함께 오순도순, 때론 고군분투 살아온 박상유(52)씨. 처음엔 ‘뭐 좋고 신나는 이야기라고 신문에 대고 동네방네 내 이야기를 떠들겠냐’며 한사코 인터뷰를 고사하던 그였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아 더 힘겹고 어렵게 살아갈 이 땅의 싱글 대디들을 위해 용기를 냈다. 아들과 함께 자리하고 싶어 했지만 이제 한창 예민한 틴에이저를 신문지상에 끌어 앉히기는 아버지도 역부족. 그러나 박씨는 아들 몫까지 보태 지난 5년간 아들과 살아온 이야기를 담담하지만 유쾌하게 들려줬다.


■밥상 차리기, 그 힘겨운 여정

처음 상처 후엔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에 아들이나 박씨나 맥없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덩치가 산만한 남정네 둘이 부둥켜안고 울기도 수차례. 그러나 하염없이 혼 빼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들을 아침밥 먹여 등교 시켜놓고 공원에서 하늘 보며 통곡할망정 일단 일상은 지속해야 했다. 아내 없이 처음 부딪치는 생활에서 가장 곤욕스러운 것은 역시 ‘밥’. 햄버거며 피자로 끼니를 때우는 것도 한 두번이고, 한국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그래서 쌀을 전기밥솥에 앉히고 김치찌개며 미역국 등을 어찌어찌 차려봤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내가 먹어도 맛없는 음식을 아들에게 먹게 하기가 미안해서’그는 교회 집사님과 권사님들께 요리법을 배우기 위해 팔 걷어 붙이고 나섰다.
“가만 있는 다고 누가 해결해 주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 손으로 해결해야만 집안 살림이 돌아간다는 것을 안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서 집사님이며 권사님들께 찌개 끓이는 법이며 국 끓이는 법을 상세히 묻고 그걸 또 종이에 적어왔습니다.”
이제는 귀동냥으로 전해들은 요리법을 나름대로 ‘재해석’해 퓨전 요리까지 하는 경지에 이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저녁 식사만은 김 모락모락 나는 밥에다 따뜻한 찌게나 국을 끓여 아들과 나눈다.
“된장찌개 요리법도 사람마다 다 틀리더라고요. 멸치 국물 내는 사람도 있고, 고기 육수로 끓이는 사람도 있고 그걸 여러 번 해보고 실패하면서 비법(?)을 전수했죠. 그리고보면 고기요리와 생선요리가 제일 쉽고 간편한 것 같아요. 신선한 재료로 잘 사서 구워내면 한 끼 식사로 가장 훌륭하잖아요?”

“재혼? 아들 대학가면…”

엄마 역할 못해준 미안함에
가능한 아들에게도 존댓말
말썽없이 자라준 게 고마워
설거지·청소조차 안 시켜
추수감사절등 명절 연휴되면
외톨이된 듯 힘들고 외로워

■엄마 역할 못해줘 미안
아들이니까, 그래도 남자니까 아들 양육이 크게 어렵지는 않겠다는 질문에 절레절레 고개부터 흔든다.
“아무래도 남자다보니 세심한 배려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죠. 아무리 노력해도 엄마가 해주는 따스한 말 한마디, 세심한 신경씀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그 때문이었을까. 박씨는 아들에게 가능한 존댓말을 쓴다. 일터에서 아들과 통화할 때도 “아드님 지금 뭐하세요?”라고 시작해 ‘컴퓨터 한다’는 샘의 말에 “그럼 이제 공부하셔야죠”로 끝맺는 평이한 대화는 물론 저녁식사 시간에도 밥상 다 차린 뒤 “아드님, 식사하세요”라고 한다니 박씨의 아들 키우기 분투기가 눈물겹다.
그뿐 아니다. 그렇게 남정네 둘이 산지 5년. 아들도 이제 클 만큼 컸건만 그 흔한 설거지나 청소 한번 시킨 적이 없단다.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아마도 죄책감 때문인것 같아요. 이게 좋은 게 아닐텐데 그래도 엄마 없이 컸는데, 그래서 엄마가 있었다면 안했어도 되는 일들에 대해 그걸 내가 시킨다는 게 미안하잖아요. 물론 아들은 주말이면 뭐 도울 일 없냐고 물어보지만 결국 집안일은 다 내가 합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부부가 자식 키우는 가정과 그리 크게 다를 것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들 부자, 명절이면 엄마의 빈자리를 가장 뼈저리게 느낀다.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가 되면 가장 힘들고 외롭죠. 그뿐인가요. 큰 명절 아니더라도 3일 연휴가 있는 날도 외롭죠. 더욱이 아들이 크고 나선 명절 때 친구들과 놀러가는 경우가 잦아져 집에 혼자 있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그래서 이제 연휴는 그냥 집안 대청소하고 빨래하고 밀린 집안일 하는 날로 정했습니다.(웃음)”

■자식이 소유물이라는 생각 버려
혼자서 자녀를 키우다보니 내공이 쌓여서일까. 박씨의 교육철학은 사뭇 한인 1세 아버지들과는 분명 틀리다. 아니 급진적이기까지 하다.
“결국 부모와 자식이 문제가 생기는 것은 부모의 과도한 기대 때문이 아니겠어요?. 자녀가 내 소유물이라고 여기는 부모들이 문제인거죠. 심지어 부모 맘대로 안된다고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도 봤습니다. 그러나 전 지금까지 아들한테 상소리 한번, 손찌검 한번 한적 없이 지냈습니다. 물론 난들 왜 화나고 언성 높아지는 때가 없겠어요. 그럴 때면 일단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아들과 대화를 시도합니다.”
덕분에 샘은 지금껏 큰 말썽 없이 잘 자라줬다. 명랑하고 쾌활할 뿐더러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아 박씨 역시 아들에게 고마울 뿐이다.
“미국교육에 익숙지않아 신문 교육면을 빠짐없이 챙겨보고 정보는 거기서 얻습니다. 그러나 공부는 자기가 하는 거지 부모가 하라고 강요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죠. 다만 부모로서 늘 대화 채널을 열어놓고 수시로 대화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재혼은 아들 진학 후로 미뤄
LA 한인타운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박씨는 지금 현재 아들과 단둘이 사는 생활에 만족한단다. 그래서 특별히 재혼할 생각도 없다고. 물론 주변에서들 ‘이제 다시 재혼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그 역시 마음 맞는 이만 있다면 평생 혼자 살 생각은 없다. 단, 아들이 대학을 진학한 다음이라는 생각은 5년째 변함이 없다.
“샘이 가끔 아빠 여자친구 없느냐고 물어요. 여자친구 있으면 데이트도 좀 하고 결혼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일단 샘이 진학할 때까지는 재혼 생각은 없습니다. 혼자 살다보면 끊임 없이 많은 유혹이 있지만 부모로서, 신앙인으로서 흔들리지 않고 사는 것이 내가 샘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부모로서의 도리가 아니겠어요?”
싱글 대디지만, 아니 싱글 대디기에 남보다 더 씩씩하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그의 웃음이 눈부셨다.

글 이주현 기자·사진 진천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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