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굵은 나이테 1·4후퇴 II - 철도 연대

2007-01-0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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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 큰 어머니께서 “저애가 볼우물이 들어가는데 타관물 먹게 생겼어”라고 걱정하며 말씀하셨지만 나는 단물을 꿀꺽 마시는 듯한 기분이 들어 싫지 않았다. 어른들이 장난으로 “너 왜 볼이 쏙 들어가니”하면 “타관물 먹을려구요~~”하며 뛰어다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니 1950년 12월 말에 시작한 나의 1·4후퇴 피난생활은 자그마치 15곳을 옮겨 다닌 후 1956년 봄,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서울로 돌아왔으니 큰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한숨을 쉬시며 “보라구 재가 볼우물 땜에 저 고생이잖아”하셨을 지도 모를 일이다.
부산진 시누님 곁을 떠나 아기와 기저귀 가방을 들고 도착한 곳이 경북 영천이었다. 그 지방 어른이 피난민을 위해 내놓은 아래채 두 평쯤 돼 보이는 방에 국방색 면이불 한 채와 담요 2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둑에 드높이 세워진 고풍스런 기와집 마당에서 저 아래 강가 백사장을 내려다보니 모래 위를 혼자 뛰어다니면 놀고 있는 사내아이가 눈에 띈다.
인기척이나 나더니 건장한 체격의 하사관이 경례를 부치며 “선임하사관 이주창 상사 입니닷. 우리 철도연대는 인민군이 퇴각할 때 철로는 물론 모든 차량을 파괴하고 도망가는 바람에 물류 소통이 완전히 마비가 되어 전투에 지장이 생겼으므로 조속히 ‘동해선’을 복구하기 위해 피난민 중에서 철도와 관계되는 기술자를 모아 조직한 부대이며 연대장은 이 대령님이고 제1 대대장이 김 소령님입니다.”하고 말을 끊었다. 나는 남편이 진급을 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전투부대는 아니지만 단기훈련으로 철저히 교육을 받았고 자기가 지닌 기술로 이 나라에 크게 이바지 할 수 있다는 자부심과 대대장님을 존경하고 따르려고 노력하는 마음들이 함께 뭉쳐 사기가 대단합니다.”
나는 평소에 서투른 농담이나 하며 실실 웃고 지내던 남편 얼굴을 떠올리며 속으로 웃고 있었다. “안동의 겨울은 유별나게 추운데 우리는 그 곳에 가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빙판 위에다 가마니 한 장씩 펴고 담요 2장을 깔고 덮고 자야 했는데 사병들은 몸이 단련이 되어 견디며 잠을 청하는데 장교님들은 잘 수가 없다고 담요 남은 것 있으면 더 달라고 하기에, 대대장님에게 담요 한 장을 덮어 드리니까 벌떡 일어나시더니 저를 책망 하셨습니다.
전체 대원에게 골고루 더 줄 수 있으면 나도 한 장 더 다우. 적탄이 날아오면 사병이나 장교나 똑같이 맞게 돼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훈련도 식사도 사병과 같이 하시니 장교님들은 이런 상황은 상관은 처음이라고들 합니다. 사모님이 오셨는데 여느 피난민들에게 하는 만큼 하라 명령하셔서 좀 있다 취사병이 밥과 콩나물국을 날라 올 겁니다. 양해 바랍니다.”
저녁 때 남편이 왔다. “안동에서 추위 땜에 힘들었다면서요?” 했더니 “야. 정말 춥더라. 아무리 잠을 청해도 안돼요. 허리를 웅크리고 떨다가 겨우 새벽녘에 그믈 그믈하고 있으면 기상나팔이니 벌떡 일어나 담요를 거두면 가마니 밑의 언 땅이 녹아서 서물이 즐펑하니… 제1 대대는 정규 한국군이 1할 정도이고, L.S.T를 타고 온 철도 기술자와 고급 인력이 1,000명이나 되니 군속 중에는 이북 정부의 국장을 지낸 사람까지 있어. 나이도 나보다 위가 많고 바짝 정신 차리고 단단히 규율을 잡아야 하니까 솔선수범하는 수밖에… 대대장인 내가 하니 너희들도 할 수 있다고”
백사장에서 혼자 놀던 아이가 살금살금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뒤에서 아이 이름을 부르더니 쫓아 들어선 아버지가 내게 미안하다며 인사를 했다. 나는 그 날 이 부자의 기막힌 얘기를 듣게 된다. 열차 기관사인 그는 남쪽으로 오는 것이 꿈이었다. 부부가 아이 하나씩 업소 흥남부두에 도달해 보니 이미 막판 아수라장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딸애를 업은 아내를 부도에 세워둔 채, 거기 있는 자루를 비우고 다섯 살짜리 사내애를 얼른 집어넣고 배 사다리를 밟았다. 다행히 들키지 않고 무사히 거제도에 내렸는데, 아이가 딸린 사람을 써 주는 데는 없었다. 마침 군에서 철도관계 일을 하던 사람을 찾는다 하여 매달렸다. 옥신각신 하는 광경을 저쪽에서 보고 있던 장교가 다가오더니 “아버지는 군속으로 뽑고 아이는 내 ‘쇼-리’로 쓰지” 했다. “이 추위에 부자가 나가서 굶어 죽어야 하겠나.” “다음날 소집 장소에 가보니, 그 장교는 우리 1대대장님이 아니겠습니까.” 철도 연대는 그 해 여름에 해체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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