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편견 깨부수는 ‘친절한 지혜씨’

2006-12-3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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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스 핍스 애비뉴 디스플레이어 매니저 최지혜씨

여기 수많은 편견을 여지없이 깨버리는 여자가 있다. 백화점, 그것도 지구상에서 부티 나는 걸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색스 핍스 애비뉴(Saks Fifth Avenue)의 디스플레이어(displayer)라 하기에 대단히 깐깐하고 ‘아티스트입네’ 할 줄 알았는데 만나보니 털털하기가 웬만한 남자 저리 가라다. 당연히 샤핑 광이 아닐까 했는데 샤핑은 끔찍하게 싫어한단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며 거만하고 얘기도 별로 없는 새침떼기일 줄 알았는데 웬걸. 한번 말문이 터지니 청산유수에다 솔직 담백함이 하늘을 찌른다. 사우스코스트 플라자 색스 핍스 애비뉴 디스플레이어 매니저 최지혜(33)씨. 그래서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녀가 더 사랑스럽고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서부 지역 16개 색스의 디스플레어 매니저 중 유일한 동양인인, 그래서 드라마 ‘환상의 커플’ 상실이의 까칠한 대사처럼 ‘어린이들, 잘난 척은 할 수 있을 때 마음껏 하는 거야’라는 말이 거칠게 없는 그녀지만 잘난 척은 온데간데없는 한없이 ‘친절한 지혜씨’를 만나봤다.

멋진 공간 재창조… 하루 12시간 강행군


▲냉정과 열정 사이

열정 하나로 이곳까지 올라왔다. 지금도 그 열정 하나로 유리천장을 뚫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열정으로 똘똘 뭉쳐 살고 싶다는 여자다. 지혜씨는. 그래서 손대면 ‘앗 뜨거워’ 소리가 절로 나올 것 같기도 하다.
14세 때 도미, LA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FIDM 시각미술학과를 졸업한 후 1997년 그가 첫 입사 한 곳은 베벌리센터 메이시스 백화점 스타일리스트. 말 그대로 시즌마다 마네킨에 예쁘게 옷을 입히는 것이다. 그러나 패션은 그의 주 종목이 아니다. 원래 대학시절부터 그의 꿈은 윈도에 그만의 멋진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메이시스에서 1년쯤 일하고 있을 때 우연히 베벌리힐스 색스 핍스 애비뉴 앞을 지나는데 백화점 윈도에서 디스플레이어들이 작업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윈도를 노크했죠. 그리고 대뜸 나도 이런 일을 하고 싶은데 혹시 잡 오프닝이 있냐고 물었죠. 그래서 일사천리로 면접이 이뤄졌고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됐습니다.(웃음)”
스타일리스트와 디스플레이어는 겉으론 비슷해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직업이다. 스타일리스트는 마네킨이 세상의 전부이지만 디스플레이어는 단순히 백화점 윈도뿐 아니라 브랜드 매장은 물론, 계단, 플로어 등 백화점 모든 공간을 재창조하는 일이다.
지혜씨는 입사 후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강행군 끝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드디어 입사 1년만에 디스플레이어 매니저로 승격하면서 사우스코스트 플라자점으로 옮겼다.
“베벌리센터 메이시스에서 일할 때 사우스코스트 플라자 메이시에 파견 나간 적이 있었어요. 그때 색스에서 일하는 한 남성 디스플레이어를 보면서 같이 간 동료들끼리 우리는 언제 저런 백화점에서 저런 일을 해보게 되냐며 부러워했죠. 근데 지금 그 남자가 제 부하직원입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꿈꿔왔던 것보다 더 많은 걸 얻게 된 셈이죠.”
■그녀의 일상, 그리고 철학  
그냥 자신이 창조한 공간을 남들이 봐줬으면 하는 것, 스쳐 가는 공간이지만 잔잔한 감동과 한 번쯤은 되돌아보게 하는 깊이를 주는 것, 그런 소소하지만 아름다운 것들이 지혜씨가 꿈꾸는 백화점 윈도 세상이다.
“사실 이 직업에 있는 많은 여성들이 ‘겉멋’이라는 게 있어요. 공주처럼 예쁘게 차려 입고 나와 내가 이런이런 디자인을, 계획을 만들어냈으니 힘든 일은 다른 사람이 해줄 것처럼 굴죠. 그러나 스타일리스트든 디스플레이든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맡은 바를 해내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단순한 서바이벌의 문제가 아니라 위로 올라가기 위해선 독하게, 강하게 마음먹지 않으면 버틸 수 없죠.”
주류사회 프로페셔널 세계에 있는 모든 한인 여성들이 이구동성 하는 얘기, 지혜씨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쉽지 않죠. 백인들이 99%인 이 세계에서 아시안이면서 여성인 건 모든 악조건은 다 갖췄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어찌 어찌하여 이곳에 발 담갔다 해도 살아남는 것, 그리고 정상에 오르는 것은 밖에서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고통스럽고 힘이 드는 과정입니다.”
이런 지혜씨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증거’는 바로 그의 책상 밑에 있다. 그이의 책상 밑엔 구두 4켤레 가지런히 놓여있다. 스니커즈와 정장구두, 굽 없는 단화 등 종류별로 놓여 있다. 하루종일 백화점 곳곳을 뛰어다니는 것도 모자라 날아다녀야 하는 처지라 뾰족구두 신고 폼 잡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디스플레이어들이 자신이 만든 공간에선 소품하나라도 남들이 건드리고 자리를 바꾸는 걸 싫어합니다. 자신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근데 전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고객들이 디스플레이 된 것들을 만져보고, 관심가지면서 그게 백화점 매출과 직결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는 거죠.”
■무늬만 화려한 막노동판
그렇다고 지혜씨에게 매일매일 즐겁고 행복한 일들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고급 백화점에 드나드는 고객일수록 훨씬 더 깐깐해 화장실에 시든 꽃이 있다고, 디스플레이가 마음에 안 든다고 수시로 걸려오는 항의전화를 감당해야 한다. 그뿐인가. 매장 판매 직원들은 이번 시즌 디스플레이어들이 매장 진열을 무성의하게 해서 매출이 오르지 않는다고 항의해 온다. 매 시즌 혹은 신상품 입고 때마다 새로 한 디스플레이에 대한 의견 역시 100%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처음엔 우리 팀이 만든 디스플레이에 항의나 부정적인 의견이 들어올 때 무척 속상하고 힘들었지만 이젠 여유도 배짱도 생겼습니다. 사실 디스플레이라는 것도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것이다 보니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서부터는 훨씬 여유로워 진 거죠.??
게다가 무거운 조형물들을 움직이고, 설치하고 하는 일은 거의 막노동 수준에 버금간다. 어떨 때는 머리보다 마음이 더 고달프고 힘들만큼, 온 몸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일한다. 그러나 일이 끝났을 때의 성취감과 만족은 이 세상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다.
■그녀가 꿈꾸는 미래는
색스는 서부지역 총 16개 백화점마다 디스플레이어들이 있고 이들을 총괄하는 디스플레이어 매니저가 있다. 즉 서부지역엔 총 16명의 디스플레이어 매니저가 있는 셈인데 이들을 총괄하는 이가 바로 서부지역 디스플레이어 매니저가 된다. 현재 그가 고지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서부 지역 매니저.
“이 분야는 사실 백인 남성들이 꽉 잡고 있어요. 주류사회 역시 특히 이런 프로페셔널 분야일 수록 그들만의 네트웍이 중요하죠. 그래서 그들 네트워크에 진입해 파티도 가고 비슷한 관심분야도 가져야 하는데 그게 쉽진 않죠. 처음엔 그들을 닮기 위해 노력했는데 지금은 생각을 바꿨습니다. 내가 바뀌기 보단 내 쪽으로 그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순조롭게 잘 되고 있다고 보는데… 모르죠.(웃음)”
본인은 미래는 모르는 것이 아니겠냐고 손사래 치지만 이미 일과 연애를, 그것도 뜨거운 사랑을 하고 있는 지혜씨의 지금 모습으로 봐서 지역 매니저는 물론 전국 총괄 매니저가 될 날도 그리 멀지는 않아 보인다. 열정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기에 말이다.

<글 이주현 기자 사진 진천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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