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굵은 나이테 흥남부두의 미국 군함

2006-11-2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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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살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자 이 아파트로 옮긴지가 오늘로 꼭 7년이 되었다. 감상에 젖어 사진첩을 넘기다가 손을 멈추었다. ‘LANE VICTORY’. 이 이름을 듣고 “아! 그 L.S.T.!” 하실 분이 아마 계실 것이다.
1950년 김일성 군대가 쳐들어오는 바람에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이 참전을 하고 압록강변까지 밀고 올라갔는데 느닷없이 중공군이 건어와 인해전술로 마구잡이 공세를 펴는 바람에 한국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서울 근방까지 후퇴를 했다. 함경선을 따라 진군하던 미군은 퇴로가 막혀 L.S.T를 세워둔 흥남부두에 집결하여 무기와 살아남은 미군을 싣고 후퇴하려는데 부두를 메운 피난민들의 “살려 달라” 아우성치는 광경을 내려다보며 한국인 통역 겸 의무관인 ‘현봉학’ 박사가 “저 사람들을 태워 달라”고 눈물로 간청하였다. 당시 함대 사령관이었던 ‘에드워드 아몬드 장군’은 무기보다 인명을 살리자 결심을 한 후 무기를 한 곳에 모아 불 지르고 울부짖는 북쪽 인민 약 10만명을 싣고 부두를 떠났다. 당시 L.S.T. 6척 중 7,000명을 태운 ‘LANE VICTORY’는 폐선이 되어 샌디에고 부두에 조용히 묶여 있었다.
고귀한 생명 10만명이나 살릴 수 있었던 그 순간의 감격과 고맙다고 눈물 흘리며 좀처럼 배를 떠나지 못하던 사람들의 뒷모습을 평생 가슴에 담고 조용히 앉아 있다. 지금 노인이 된 몸으로 그 곳에 돌아와 무료 봉사를 하고 있는 그 때의 한 용사들에게 남편이 “한국 사람들이 많이 찾느냐”고 말을 걸었다. “아마 그때 L.S.T가 이 배인 것을 잘 모를 테니까요…” 들여다보는 한국인이 없는 모양인데 참으로 미국인다운 아량 있는 대답이었다. 섭섭한 마음을 품을 만도 한데…
냉면집에 앉아 L.S.T.를 타고 왔다는 분들과 남편이 얘기를 하는 것을 옆에 앉아 들었다. “연합군이 들어오자 이제 새 세상이 왔다고 태극기를 만들어 들고 몰려 나갔는데 입버릇이 되어 ‘이승만 괴뢰군 만세’하고 태극기를 흔들어 댔으니 ‘하 하 하’. 북으로 행해 진격하던 트럭들이 서둘러 돌아오기에 이상해서 물어봤더니 3일 후에 다시 온다고 하는데 그 사이에 인민군이 들이닥치면 만세를 불렀으니 무사할 리 없다 싶어 3일이라니까 앉아서 당하기보다 3일을 걸어서 트럭을 쫓아가 보자하고 걷기 시작했는데 점점 분위기가 스산하고 짐을 진 사람들이 길을 메우는데 결국 도착한 곳이 흥남 부두이니 홀로 남은 어머님을 사시는 못 보게 되고 말았지요. 대신 남쪽에 와서 가족도 생기고 미국까지 와서 살게 됐으니…” “이 배를 따라가야 산다! 악착같이 매달리려고 서로 밀치고 아우성인데 군함이라 쇳덩이인 데다가 너무 높아서 기어 올라갈 수도 없고 발을 동동 구르다 지쳐 버렸는데 그때 ‘장정들만 나와서 저 자루를 지고 올라오라’ 했어요. 그런데 올라갔던 사람들이 내려오지 않는 겁니다. 옳지 데리고 가는구나. 눈치를 채고 너도나도 거기 자루 한 개씩 메고 죽어라 뛰어 올라갔지요. 노인이고 소년이고…”
“짐을 내려놓으니 코쟁이들이 구석으로 들어가라고. 어찌나 촘촘히 앉았던지 운신하기도 힘든데 자꾸만 더 끼어 앉으라고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야 한다고 소리 지르고. 이제는 살았구나 싶으니까 부두에 세워놓은 가족들 때문에 눈물을 훔치는 사람도 있고…” “배를 타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부두에 남은 식량을 가지고 들어가라고 광고한 후, 탱크 장갑차 등 그 아까운 무기들을 모아 놓고 불을 지르더니 배가 떠납디다.” “자꾸 눈물이 흐르는데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이 배가 가는 곳에서 우리를 반가워할까. 뒤를 돌아보니 육지는 안 보이고 하늘 높이 무기가 타는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미국이란 나라는 대단한 나라구나 생각했지요”
이야기는 그칠 줄 모르고 냉면이 불어서 엉망이 되었을 때 남편이 하던 말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저 배는 나를 태워다 준 배가 아니지 싶어도 한번 샌피드로 부두에 가보라구요. 흥남부두를 떠난 날이던지 아니면 1년에 한번쯤 아이들과 함께 소풍 겸 그 L.S.T.의 갑판을 밟아보고, 평생을 두고 그때 일을 잊지 못해 기쁨으로 봉사를 하고 있는 늙은이들과 악수도 하고 기념품이라고는 살 만한 것도 없지만 아이들에게 모자 한 개씩 씌워주면 어떤가 싶은데…”
1992년 3월 ‘레인 빅토리’에서 찍힌 내 모습은 너무 젊어 보인다. 아직도 그 배는 그 곳에 서 있을까. 자그만치 10만명이나 되는 생명을 살려낸 현봉학 박사와 에드워드 아몬드 장군은 지금 어디에 살고 계실까. 아시는 분은 널리 알려서 잔치라도 벌였으며 좋겠다.
(213)389-6313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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