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무언의 가르침

2006-11-0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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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일기

승욱이 이야기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밥을 많이 먹어도 배 안 나오는 여자, 머리에 무스를 바르지 않아도 윤기가 흐르는 여자, 멋내지 않아도 멋이 나는 여자, 껌을 씹어도 소리가 안 나는 여자, 뚱뚱해도 다리가 예뻐서 짧은 치마가 어울리는 여자… 대학시절 듣던 유행가 가사다. 크~ 이런 모습 때문에 우리 남편이 나에게 매력을 느꼈다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뒤 난 아이들이 남기고간 주스며, 토스트며, 치킨 너겟 심지어 음식하다 부엌 바닥에 떨어진 음식까지 주워 먹고 식탁을 떠날 줄 모르고 있다. 과거에 입던 청바지는 꽉 껴서 일명 몸빼 바지(넉넉한 고무줄바지)를 입고 있고, 밥을 너무 먹어 배는 임신 6개월을 달리고 있고, 머리는 하도 안 감아서 기름이 좔좔 흐르고, 멋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져있고, 껌을 씹으면 나도 모르게 딱딱 소리를 내며 풍선까지 불고 있고, 뚱뚱한 하체로 인해 치마는 옷장에서 사라진지 오래고… 요즘의 나의 모습이다.
머리하나 질끈 동여 묶고, 눈꼽은 끼여 있고, 티셔츠는 며칠째 똑같은 옷에, 김치국물 질질 흘려 앞가슴 위로 국물줄은 피아노 악보처럼 나있고, 이불은 침대에서 나온 그대로 다시 저녁때 들어가고, 아이들 옷은 여기저기, 아침마다 아이들 양말 찾는 것이 일이고… 한심하다 한심해.
직장 다닐 때는 나름대로 커리어우먼의 모습이었는데 요즘 집에 있으니 모든 것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다. 옆에서 잔소리하는 엄마도 없으니 완전 폐인이다.
주섬주섬 승욱이 먹다 흘린 과자도 주워 먹고, 승욱이 먹던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전화가 온다. 한국에서 엄마가 전화를 거신거다. “그래, 엄마 없으니까 집은 엉망이고, 애들은 매일 햄버거 사먹이고, 부시시 부시맨처럼 지내고 있지?” ‘엥’ 우리집에 비디오 카메라 설치되어 있는거 아니야?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시네?’
난 오버하며 “아니~ 집은 진짜 깨끗하고 애들은 너무 잘 먹여서 토실토실 아기 돼지같고, 나도 여기저기 오라는 데가 많아서 너무 잘 지내. 엄마 여기 걱정이랑 하덜덜 말고,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맛난 것도 많이 먹고 와 알았지?”
엄마는 “니가 애들 굶기고 있을 것 같아서 걱정이 태산이다. 그러나 저러나 내가 전화한 이유는 아버지 세금보고 하라고 전화했어” 난 “세금보고? 아버지 작년에 한달 밖에 일 안 하셨는데 세금보고 해야 하나?” 엄마는 “한 달을 일한 것도 일한거니까 세금보고 하고 세금관계를 잘 마무리해라. 엄마는 이만 바빠서 끊는다, 뚝.” 치… 내가 뭐 아쉬운 소리할까봐 서둘러 전화 끊는거봐. 우리 엄마 맞아?
엄마와 전화를 끊고, 위층에 아버지 서랍이 있는 곳으로 갔다. 아버지가 계실 때 나에게 무엇이 어디에 있고, 중요한 서류는 어디에 두었는지를 다 알려준 상태이다. 서류가 어디 있는지 다 알지만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 한번도 서랍을 열지 않았다. 그냥… 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꾹 눌러놨던 울음 펌프가 또 솟아오를 것 같아서 일부러 외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쩔수 없이 열어봐야하는 상황이다.
난 아버지의 서류상자들을 하나둘씩 열어보았다. 너무나 정리 정돈이 잘되어 있고, 깔끔한 봉투에 하나하나 이름을 달아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미국에 오신 해부터 세금보고 한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잘 넣어두셨다. 그리고 영수증과 은행서류등도 년도별로 잘 정리가 되어있다. 낯익은 아버지의 필체를 보니 또 울컥이다. 아버지의 성실함과 근면함을 이 딸이 그것을 못 따라 가고 있으니 마땅히 부끄러울 수밖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서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언 22장 6절).
아버진 떠난 자리도 너무 아름답다. 아버진 돌아가셨어도 나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계시다. 말씀으로 나에게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무언의 삶의 자세가 나를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자유를 넘어서 방종한 생활을 하고 있는 나에게 뭔가를 알게 하신다. 게으름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나에게 또 깨달음을 주신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잠언 10장 4절 말씀처럼 게으른 나의 생활태도를 권면하고 있다.
두 아이의 엄마, 하나님이 이 땅에 귀한 두자녀의 엄마로 부르신 그 일에 부지런하지 못하고, 충실하지 못한 내가 반성을 하고 있다. 이젠 정신 차리고, 밥상 잘 차리고!! 잠시 풀어진 고삐를 다시 고쳐 메고 나 앞으로 전진~~

김 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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