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명품에 대한 재고찰

2006-10-2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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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에 대한 재고찰

파리 여행객이라면 한번쯤은 꼭 들러볼 만한 브리스톨 호텔. 트렌디한 젊은 여성들에겐 선망의 명품호텔이다.

이주현 기자의 트렌드 따라 잡기

명품으로 부를 과시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이젠 공부하지 않으면 엄청난 돈을 쓰고도 ‘스타일리시한데’ 하는 소리 한마디 못 듣고 돈만 날리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역시 화이트 셔츠하면 질 샌더야. 사각사각 부드럽고 바느질은 촘촘하니까’ ‘꼼 데 가르송은 위트가 뭔지 확실히 보여주는 걸’ ‘마르탱 마르지엘라, 앤 드뮐미스터의 옷은 에지(edge)가 있어 좋아’ ‘이세이 미야케를 입으면 패션을 넘어 진정한 아트를 이해하는 경지에 오른 듯하지 않니?’ 등 적어도 이 정도 이야기는 주워 삼켜야 명품의 세계에 가까스로 입문했다 할 수 있는 것이 요즘의 ‘척박한’ 현실이 돼버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명품은 ‘남과 다른 나’를 경계짓는 확실한 자본주의의 도구였을 뿐이다. 누구나 다 살 수는 없는 명품을 산다는 건, 나보다 아래인(아래라고 생각하고 싶은) 그룹을 향한 싸늘한 결별 선언(“나는 당신과는 다르다”). 동시에 나보다 위인(미치도록 속하고 싶은) 그룹에게는 러브콜(“나도 끼어 줘”)을 보내는 행위였다.
수 백년 전엔 노예의 수와 장원의 규모를 가지고 부와 권력을 과시했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물을 필요도 없이 그가 소유한 물건이 잣대가 되고 신분이 된다.
얼마짜리 주택을 소유하고 있는지, 통장에 얼마가 있는지는 슬쩍 감춘 채 그저 내가 걸친 것만 보여주며 쌩긋 웃는 것이다. 내가 걸친 브랜드가 내가 누군지 말해준다는 확실한 믿음 하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제 명품이 단순히 경제력만을 판가름해 주는 시대는 지났다. 돈만 많다고 으스댈 수 없는 시대, 즉 이름하여 스타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세계는 지금 스타일과의 전쟁 중이다. 취향을 놓고 내공을 겨루는 한판승이다. 루이비통이라고 아무거나 들면 안 된다.
모노그램 스피디(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빈티지가 아니라면)를 들고 다니는 것은 ‘명품 제1단계 겨우 진입’했음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다라고 말하면 물론 천박한 비약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가방으로 매출을 끌어올리려는 브랜드들이 경쟁적으로 매 시즌 출시하는 새로운 모델, 좀 더 가격이 뛴 모델을 남들 다 들기 전에 재빨리 골라 들어야 한다.
명품을 논하는데는 옷과 가방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물은 에비앙? 피지 워터? 샌펠레그리노(San Pellegrino)?’ ‘샴푸도 역시 시슬리야, 그래도 헤어케어 전문인 르네 휘테르를 쓰는 게 좋을까?’는 일단 기본. 파리 갔냐, 런던 갔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런던에서는 블레이크스(Blakes) 호텔에서 잤고, 파리에서는 브리스톨(Le Bristol)에서 잤다가 더 강력하다.
꼭 그 비싼 데서 자보지 못해도 상관없다. 선수치고, 알아듣고, 맞장구 칠 정도면 취향과 안목을 인정받는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이 험난한 대열에 반드시 진입할 필요는 없다. 취향과 안목 한번 길러보겠다고 아둥바둥거릴 필요는 더 더욱이 없다. 그저 패션은 즐기고 만족하면 되는 거니까.
부처는 득도를 위한 여정에서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부처를 만나면 부처조차 죽이고 정진하라고 했거늘 하물며 저자거리 패션의 취향과 안목에서 명품이 짐이 된다면 당연히 목을 베어도 상관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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