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요즘은 전쟁도 많고 영웅도 너무 많다”

2006-10-2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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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전쟁도 많고 영웅도 너무 많다”

이오지마 전투를 미군측에서 본 ‘우리 아버지들의 기’와 일본군측에서 본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동시에 감독한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 영화를 통해 전쟁에 관한 영화인로서의 당신의 의견을 표명하려 했는가.
▲영화에서 전쟁과 영웅주의에 관한 얘기를 하려고 했다. 특히 엄청난 전투를 치른 후 영웅이 된다는 것에 대해 콤플렉스를 갖는 사람들에 관해 얘기하고자 했다. 실제로 전쟁에 참가했던 군인들은 자신들의 경험에 대해 얘기하기를 꺼려한다. 나는 최근 24세 때 대위로 이오지마 전투에 참여했던 프레드 헤인즈 중장을 만났는데 그도 당시 경험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영화의 원작인 소설을 쓴 제임스 브래들리의 아버지로 수리바치산에 성조기를 꽂았던 존도 가족들에게조차 전쟁 얘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를 영웅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문자 그대로의 전쟁영화라기 다 인물에 관한 영화라고 봐야 한다. 성조기를 게양한 뒤 본토로 불러들여진 3명의 군인의 인물 탐구영화이다.
-왜 이오지마 전투를 일본군 입장에서 본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만들기로 했는가.
▲이오지마에 관한 공부를 하던 중 이오지마 주둔 일본군 총사령관 타다미치 쿠리바야시 장군의 탁월한 전술에 관해 알게 되었다. 그의 정체가 궁금해 일본에 있는 내 친구에게 쿠리바야시에 관한 자료를 부탁했다. 쿠리바야시는 20대 후반 주미 대사관 공사였고 하버드에서 영어를 공부한 사람으로 미국을 좋아했다. 그는 미국 친구가 많았고 일본의 대미 선전포고를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섬을 사수하기 위해 파견된 뒤 3~4일이면 끝나리라고 예견했던 전투를 한달 이상 끌고 갔으니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 일본에 있는 내 친구가 보내온 책들은 대부분 쿠리바야시가 미국에 있을 때 아내와 아들과 딸에게 보낸 편지들인데 이를 통해 그의 내면을 읽을 수 있었다. 두 영화가 모두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쟁의 쓸데없음이다.
-영화에서 일본군을 거의 볼 수 없는데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는가.
▲그렇다. 미군측의 얘기만 하려고 했다. 한 영화에서 양측의 얘기를 모두 보여준다는 것은 너무나 엄청난 일이다. 일본군 측의 입장은 다른 영화에서 다루려고 했다.
-영웅주의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요즘에는 영웅이 너무 많다. 내가 자랄 때만 해도 영웅 하면 루즈벨트 대통령이나 아이젠하워 및 패튼 등이 고작이었다. 나는 전쟁에서 영웅적 행동을 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들은 모두 그들의 행동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했다. 내가 올챙이 시절 유니버설에서 일할 때 오디 머피(2차대전의 영웅으로 영화배우)를 만났는데 그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한번도 얘기하지 않았다. 진짜로 전쟁에 참전한 사람들보다는 후방에 남이 있던 사람들이 오히려 전투에 대해 더 말을 많이 한다.
-당신의 애국정신에 대한 견해와 함께 2차대전에서부터 이라크전에 이르기까지 전쟁에 대한 당신의 관점이 어떻게 변화했는가.
▲2차대전에서부터 시작해 한국전과 베트남전 그리고 두 차례에 걸친 이라크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전쟁을 해오고 있다. 전쟁을 얘기하려면 결국 이상주의와 종교를 다루게 되는데 오직 역사만이 그것의 뜻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전쟁을 싫어한다. 나는 이 영화를 전쟁 얘기를 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다. 내 나머지 삶을 전쟁 없이 살고 싶다. 참으로 어려운 딜레마인데 현재 상황과 이 영화 당시의 상황 사이에는 여러 가지 아이러니가 존재하고 있다.
-당신은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가.
▲요즘은 참 어려운 세상이다. 그럴수록 낙관적이 되어야 하고 또 사람들이 옳은 일을 하기를 희망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일본 수상의 야수쿠니 신사 참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떤 나라에서는 그것이 비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난 그것에 대해 자세히 알지를 못한다. 중국이 참배에 반대하고 있는 것을 아는데 아마도 역사가 그것에 대해 이해시켜 주리라 생각한다(그는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왜 영화를 일본에서 안 찍고 아이슬랜드에서 찍었는가.
▲영화 촬영 전 일본에 가서 이오지마를 관리하고 있는 도쿄 도지사를 만나 적극적인 협조를 얻어냈다. 그래서 섬에도 가봤는데 일본측은 이 섬을 신성시하고 있어 우리들이 섬을 다시 한번 점령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오지마처럼 검은 사장과 지열과 광물 수증기를 내뿜는 아이슬랜드를 찾아냈다. 이오지마에는 아직도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1만2,000여명의 일본군이 매장돼 있어 그들은 이 곳을 매우 신성시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분만 여기서 찍었다.
-왜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젊은 배우들을 썼는가.
▲앙상블 연기를 위해서인데 이오지마 전투에 참전한 당시 해병들의 평균 나이가 19세여서 그 나이층에 비슷한 배우들을 기용했다. 그러나 영화 끝에 나오는 사진 속의 당시의 실제 군인들의 얼굴을 보면 모두 40대로 보인다. 섬에 상륙했을 때 젊었던 사람들이 몇 주만에 20년이나 늙어버린 것이다.
-영화에서 미국 내 얘기들 특히 아이라 헤이스(피마 인디언이었다)에 대한 시민들의 대우를 보면 마치 반애국적 영화를 보는 느낌인데.
▲내 영화는 애국적도 아니요 반애국적도 아니다. 양면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미정부가 세 군인을 이용한 뒤 버린 것은 유감스럽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그런 일은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일본 배우들을 써 일본말로 만드는데 어려움은 없었는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나라와 그것의 언어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 각본이 있어 일본 배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 수 있었는데 결국 연기는 연기이고 얘기 서술은 얘기 서술이어서 잘 끝났다. 좋은 연기란 눈과 얼굴 표정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꼭 언어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같은 전쟁이지만 다른 각도에서 본 것이어서 완전히 다른 기분이었다.
-당신이 자랄 때 당신에게 깊은 영향을 준 영화들은.
▲40년대 영화들을 가장 많이 봤다. ‘우리 생애 최고의 해’등 황금기의 영화들이다. 존 포드, 하워드 혹스, 알프렛 히치콕, 프랭크 캐프라 및 빌리 와일더 등을 존경하며 자랐다. 그들은 많은 명작들을 잇달아 빨리 만들었다. 존 휴스턴 같은 감독들은 요즘 같은 기술이 없었던 때 정말 걸작들을 만든 사람이다. 또 당시에는 뛰어난 배우들이 많았다. ‘시에라 마드레의 황금’과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도 내가 좋아한 영화이고 내가 꼬마 때 본 ‘요크 상사’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영화다. 전쟁영화로는 ‘전장’과 ‘철모’등이 좋았고 제임스 스튜어트를 자주 쓴 앤소니 맨의 웨스턴도 좋아했다.
-어떻게 군에 들어갔는가.
▲음악을 공부하려고 시애틀대에 입학하기 직전 징집돼 북가주 몬터리 반도 지역에서 군생활을 했다. 군인들에게 수영을 가르쳤고 군 역사와 훈장에 관해 가르치는 대리교사로도 일했다. 전선에 배치 안된 게 행운이었다. 제대 후 매달 110달러씩 나오는 GI 빌로 공부를 했다. 대학을 2년 정도 다니다가 아버지의 반대를 물리치고 배우가 되기로 결정했고 고생을 하다가 50년대 후반에 TV 시리즈역을 얻게 된 후로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박흥진 편집위원>

오늘 개봉된 전쟁영화 ‘우리 아버지들의 기’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인터뷰

20일 개봉되는 전쟁영화 ‘우리 아버지들의 기’(Flags of Our Fathers-영화평 참조)를 감독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와의 인터뷰가 지난 5일 그의 영화제작사인 말파소가 있는 LA 인근 버뱅크의 워너브라더스 스튜디오에서 있었다. 큰 키에 다소 마른 듯 단단한 체구를 한 이스트우드는 완전 백발이었지만 76세 나이답지 않게 원기 왕성하고 신선해 보였다. 감색 상의에 회색 타이를 맨 그는 안경을 끼고 인터뷰에 나왔는데 가끔 농담을 해가며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질문에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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