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친구 성희

2006-10-14 (토)
크게 작게
여학교 때 내 뒷자리에 앉았던 성희는 비슷한 나이인데도 우리들보다 성숙해 보였으며 같은 교복을 입었어도 어딘가 멋이 풍기고 말도 조심조심 약간 떨리는 듯이 부자연스럽게 들렸는데 유행가는 기차게 잘 불렀다. 나는 어려서 아버지가 새 유성기 판이 나오는 족족 사오시는 통에 모르는 유행가가 없었으나 성희는 나같이 밋밋하게 부르는게 아니라 살살 녹이듯이 간드러지게 아름다운 목소리로 불러 제끼는데 기가 막혔다.
나는 2학년이 되자 기숙사를 나와 청진집에서 통학을 했는데 성희와 같은 역에서 타고 내리고 하다보니 자연히 가까워졌다. 그녀는 아주 건강하게 보였는데 겨울에도 코트를 안 입고 교복만 입은 채 학교로 나왔으므로 “뚱뚱해 보일까봐 멋을 부리느라고 저런다”며 수군대는 친구들도 있었으나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그녀는 무용에도 소질이 있었으며 공부도 열심히 했다.
우리가 4학년이 되었을 때 동경 유학에서 돌아온 언니가 체육, 무용선생이 되었는데 성희가 무용도 잘하고 체조도 정확하게 잘한다며 성적도 좋으니 자기 후배로 동경여자체전에 추천하고 싶다고 했다. 언니는 그 학교에서 개벽 이래의 성적으로 조선인 학생에게 준 일이 없다는 수석자리를 지키고 졸업을 했으니 모교의 명예를 위해 아무나 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노라며 나더러 성희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내가 그 말을 전했더니 “집의 형편이 어려우니 상급학교에 갈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언니는 그녀의 재주가 아깝다며 어머니에게 자기 월급으로 성희의 학비를 대주고 싶다고 의논하니 어머니도 평소에 그녀를 좋게 보셨으니 찬성하셨다. 내가 성희에게 그 말을 전했을 때 내 손을 꼭 쥐며 눈물을 글썽이던 일이 생각난다.
그런데 이변이 생긴 것은 진학에 대한 상담을 위해 언니와 마주 앉은 성희가 털어놓은 사실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 자기를 데리고 어머니가 소실로 들어갔는데 새아버지가 구박을 하며 학교에는 보내나 겨우 교복만 갖춰주어서 겨울에도 내복도 오바도 없이 다닌다고 하더란다. 친구들은 그런 사정을 몰랐으니… 언니도 나도 몹시 놀랐다. “세상에 영하 30도 추위에 없어서 못 입었다니!” 우리 자매는 더욱 그녀를 동정하게 되었으나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그 엄마가 너무 나쁜 여자다. 아무리 사정이 있다 해도 하필이면 첩살이인가 싶은데 하나뿐인 딸을 엄동설한에 벗겨서 내보내고 그게 어디 어미냐? 첩 노릇을 할랴면 제 몸은 말끔히 차려입을텐데 성희에겐 안 됐지만 우리 집에서 첩의 딸을 돕는 일은 반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소실 문제로 독이 잔뜩 오른 분이라 단호하셨다.
그 후 나는 일체 모르는 일로 하고 언니가 잘 수습했으나 두고두고 찜찜했었다. 몇달후 우리는 졸업을 했다. 해방후 내가 이대에 온 것을 알고 성희가 ‘중앙여자대학’에 다닌다며 4각모를 쓰고 찾아와서 “이대 성악과에 옮기고 싶다” 했으나 이대 같이 까다로운 학교에서 내 힘으로 도울 수는 없었다. 1946년 봄 한동안 몹시 어려웠던 나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와 당장 기숙사로 들어가라는 허가를 받게 되었다. 신촌에 들어가면 좀처럼 시내로 나오기가 어려울 것 같아 그동안 궁금했던 성희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녀는 마침 책장사를 나가려던 참이라며 신간서적 30권 가량을 쌓아놓고 나를 맞았다. 우리는 할말이 많았건만 서로 쳐다만 보고 앉아 있다가 성희가 불쑥 “유행가수나 될까봐” 내뱉듯이 한마디했다. 지내기가 힘든 모양이다. 순간 나는 이대 성악과에 다니고 싶다던 그녀의 말이 떠올라 “야, 그래도 어찌 유행가수가 되냐? 너는 오페라 가수감인데 무용도 잘 하고…” 그녀를 추켜세우고 힘을 준다고 해본 소리였는데 내가 두고두고 후회하는 것은 그때 ‘유행가수면 어때서’ 하는 내 솔직한 마음을 그대로 전해주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래 너 참 간드러지게 잘 넘어갔지않아. 진짜야, 담박 성공할거다. 해봐라 해봐!” 그래줬더라면 성희는 그 길로 큰 성공을 거두었을테고 고달픈 인생길에서 불행하게 요절하지는 않았을 것을…
그녀는 얼른 말을 바꾸고 “나 서점에서 부탁 받고 저녁에는 이거 팔러 나가야 하거든” 했다. 나도 책 열댓권을 갈라들고 둘이 명동에 나갔다. 어두워지니 제법 공기가 쌀쌀한데 땅바닥에 보자기를 펴고 책을 쌓은 후 나를 보고 씩 웃더니 큰 소리로 “고학생입니다- 책 사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한참 후 멀쑥하게 생긴 청년이 와서 책장을 뒤적뒤적 하더니 “어두운데 들어가요. 이런거 왜 해요?” 하며 한권을 사들고 돌아섰다. 청년이 저만치 간 후에 그녀가 화난 목소리로 “자식, 이런거 왜 하냐구? 38선을 넘어왔어. 아무도 없단 말이야!”
그날 밤 헤어진 후 나는 그녀를 다시 보지 못했다. 고생고생하다 학교를 그만 두고 결혼했다는 말을 들었다. 몇 해 후 부산 피난지에서 의처층이 심한 남편의 매질에 못 이겨 영도다리에서 몸을 던졌다는 말이 들려왔다. 성희야!

김순련 <화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