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요즘 사모님 패션

2006-10-1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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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현 기자의 트렌드 따라 잡기

사모님 패션이란 뭘까. 

이브닝 드레스에 모피 숄 두르는 거, 딱 떨어지는 한 벌 정장 수트를 입는 거, 혹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감는 거, 물론 ‘사모님 룩’ 맞다.
그러나 몇 년 전 내가 생각한 바람직한 ‘사모님 룩’은 한국 일일 드라마 사모님 역 단골인 탤런트 한혜숙씨가 보여준 옷차림과 꽤 흡사했다. 샤넬 트위드 수트(꼭 샤넬이 아니더라도 샤넬 못지 않게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투피스)를 입고, 가슴엔 지나치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브로치를 달고, 손엔 누가 봐도 비싸 보이는 악어 가죽 핸드백을 드는, 그런 차림말이다.
그런데 얼마 전, 한 유명 브랜드의 백화점 트렁크 쇼(trunk show)에 참석한 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모님 패션이 현실과 한창 동떨어져도 너무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곳에 모인 다양한 인종의 ‘장안의 사모님’ 30여 명 중, 트위드 수트를 입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브랜드가 30대 초반에서 40대 후반까지의 ‘사모님들’이 주요 타겟이라는 사전정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모인 여성들의 나이를 짐작하기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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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마흔 셋의 탤런트 황신혜. 요즘 사모님들이 가장 따라하고 싶은 패션 리더다. 적당한 페미닌함이 느껴지는 절묘한 믹스 앤 매치가 패셔너블하다.

그녀들은 ‘아주머니’라고 하기엔 너무 젊었으나, ‘아가씨’라고 하기에도 왠지 석연치 않은 외양을 하고 있었다. 그녀들의 옷차림은 하나같이 달랐으니 거기엔 몇몇 공통점들이 있었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첫째, 세븐 진에서 락 앤 리퍼블릭, 트루 릴리전에 이르기까지 프리미엄 진을 입었다. 둘째, 하이틴 소녀들이 캐릭터 장식품을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명품 액세서리를 좋아한다. 샤넬 머리 끈, 펜디 벨트, 디올 열쇠고리 등으로 곳곳을 장식했다.

셋째, ‘노티’나는 핸드백은 절대 사양. 아무리 명품이라해도 무뚝뚝한 검은색 악어가죽 백은 절대 들지 않는다. 핑크, 그린, 옐로 등 파스텔톤 컬러의 악어가죽 백이나 마크 제이콥스, 발렌시아가, 클로이 같은 트렌디한 가죽 백을 선호한다.
넷째, 20대를 타겟으로 하는 브랜드에도 전혀 거부감이 없다. 거부감은커녕 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나 까샤렐(Cacharel), 모스키노 칩 & 시크(Moschino Cheap and Chic) 등을 에르메스만큼이나 좋아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본래의 손톱 색깔을 남들에게 보이는 것은 내밀한 속살을 보이는 것만큼이나 수치스러운 일, 손톱과 발톱은 반듯이 깨끗이 손질하고 그 위에 핫핑크에서부터 와인에 이르기까지 과감한 컬러의 매니큐어를 바른다.
그날 트렁크 쇼 현장에서 몸무게 110파운드, 허리 사이즈 26인치 내외, 아가씨보다 더 날씬하고, 아가씨보다 더 팽팽한 피부를 가진 사모님들 틈에 끼어 앉아 ‘지구에 불시착한 화성인’ 같은 지독한 이물감 속에 한 시간여를 보내고 나니 사모님에 대한 내 생각이 민망스럽다 못해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가씨보다 더 아가씨 같은 사모님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사모님=샤넬 수트’라는 고릿적 공식을 여전히 고집하다니 말이다.
이젠 아가씨들이 사모님을 경쟁상대로 패션을 논하고 옷을 입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말았으니 이를 우리는 비극이라 불러야 할까, 냉엄한 현실이라 할까.
답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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