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매킨리 등반기 <7>

2006-09-2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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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킨리 등반기 <7>

온 천지가 눈으로 흰 장막이 쳐진 듯 한 하이 캠프. 작은 텐트들만이 하얀 눈과 대조된다.

매킨리 등반기 <7>

칼바람과 추위를 견디며 정상을 향해 전진했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가이드팀 따라 단독 정상 재도전

에델바이스 산악회 원정대 유재일 대원

영하 30도 칼바람 - 눈보라 불구 강행군
정상 앞두고 가이드마저 포기 진퇴양난


2006년 6월 11일
인간의 마음이란 늘 변하는 것인가… 오늘 렌딩 포인트로 하산을 하기로 했지만, 어제 밤부터 계속 눈이 내리고 있어 하산 길이 막혔다.
종일 텐트 안에 갇혀 있으며 이대로 모든 걸 포기하고 내려가려니 마음도 내키지 않았다. 준해 형에게 “형! 6월16일이 되려면 아직도 엿새나 남았어! 눈이 그쳐도 며칠만 더 머물다가 날씨가 좋아지면 다시 올라가자.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데 이대로 철수한다는 것 정말 너무 억울하잖아”라며 준해 형을 설득하자 마음 약한 준해 형은 그렇게 하라고 한다.
형의 마음을 돌려놓고는 고소에 지친 몸을 추스르느라 하루 종일 텐트 안에서 형이 해주는 밥을 먹고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기 예보를 기대하며 잠만 잤다.

2006년 6월 12일
내일의 기상 상황을 위해 레인저 사무실에 들러보니 내일부터 3일 동안 바람이 30마일 정도로 분다고 한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며 내일은 무조건 하이 캠프로 올라가기로 마음을 먹고, 준해 형에게 안자일렌을 같이 할 사람을 구해 달라며 하루 종일 잠을 자다가 오후 늦게 캠프 사이트의 눈 블럭 보수를 하고 일찍 잤다.

2006년 6월 13일
나는 이번 등반에 마지막이 되는 등반에 다시 나섰다. ‘헤드 월’ 벌써 2번째 다시 그 곳을 밟는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나선다.(11:03) 헤드 월 상단의 버트레스는 눈바람이 몰아쳐서 힘든 산행길이 예상되지만,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기회임을 알기에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오른다.
고도에 의한 호흡이 가쁜 것도 있지만 지난번과는 달리 체력소모가 많아 선지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새들에 도착(14:40) 우측 버트레스 능선을 따라서 오르는 동안 거세 바람이 불어오고 다리는 약간의 통증이 오면서 마음을 초조하게 만든다. 하이 캠프에 도착을 하니(16:47) 10여동의 텐트가 있었지만 모두들 추운 날씨 때문인지 텐트 밖으로 나온 사람은 없다.
산에서 친분인 쌓인 스페인팀의 대원을 “내초! 내초!”하고 부르니 옆 텐트에서 내초와 안토니오가 나온다. 내일 아침에 같이 안자일렌을 하고 출발하기로 약속을 하고 다시 텐트 안으로 들어간다. 드디어 내일이면 데날리 정상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구나 하며 날씨가 좋기만을 기대해 보며 잠을 청한다.

2006년 6월 14일
“애디! 애디!” 하며 내초가 깨우는 소리에 시계를 보니 새벽 5시 텐트 지퍼를 여니 밖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초는 눈이 온다며 불안해하고 있다. 나는 오늘은 날씨가 좋다고 했으니 조금 더 기다려 보자고 하고 데날리의 신은 나를 받아 주지를 않는구나 하며 모든 걸 포기하고 다시 침낭 속으로 들어가 편안하게 눕는다.
오전 6시30분에 스페인팀 내초와 안토니오는 등반을 포기하고 하산을 하겠다며 어떻게 할 거냐며 묻는다. 나는 조금 더 기회를 보다가 하산을 하겠다며 먼저 하산을 하라고 말하고 나니 또 나 혼자라는 생각에 온몸에 힘이 빠진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밖을 내다보니 가이드 팀이 배낭을 꾸리고 있다.
텐트를 걷지 않고 배낭을 꾸리는 것을 보고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 하고 빨리 눈을 녹여 아침식사를 만들다, 오른쪽 양말에 물을 엎질러 불길한 생각도 들었지만 언제 이런 기회가 다시 올 거냐며 배낭을 꾸린다.
밖으로 나오니 조용히 눈이 내리고 있다. 하이 캠프의 온 천지가 내리는 눈으로 흰 장막이 쳐진 듯하다. 모든 게 절제되고 생략된 작은 텐트들만이 하얀 눈과 대조되어 침묵 속에 빛이 난다.
드디어 그들이 출발을 한다.(09:06) 데날리 패스를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조금씩 걸음을 옮긴다. 눈발이 약해지며 저 멀리 데날리 패스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 뒤를 따라서 나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따라가며 걷는다.
데날리 패스의 설 사면에 가까워지니 갈수록 바람은 상상을 초월한다.
거센 바람에 체감온도마저 떨어진 데다가 아침에 물을 엎질러서 젖은 양말을 신은 오른쪽 발이 얼어온다. 이 추위를 이겨야 한다며 발가락을 계속 움직이며 걷지만, 물기에 젖어 얼어붙은 발가락은 점점 더 얼어오고, 바람은 워낙 강해서 우리의 진행을 방해한다. 저 멀리 내 뒤로 다른 등반 팀 십여명이 하이 캠프를 출발하는 것도 보여서 마음은 든든하다.
드디어 긴 설원을 통과 데날리 패스로 올라가기 시작하는 40여미터 가량 되는 수직 빙벽에 도착했다. 이 곳은 고정 로프가 설치돼 있지 않아 모두들 아이섹스로 빙벽을 찍으며 올라가기에 바쁘다.
설 빙벽 경사각은 매우 가팔랐다. 급경사라 아이섹스로 힘껏 찍고 몸을 당기며 클렘폰으로 설빙을 찍으며 올라가려니 몇 발자국도 못 올라가고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달래야 했다. 너무나 급한 설 사면이라 모두들 너무 힘이 들어서인지 몇 번이고 쉬고 쉬고 하며 올라간다. 몸에서는 산소가 모자란다고 아우성이라 정신까지 혼미해지는 듯했지만 안자일렌도 없이 혼자서 올라가는 나는 발이라도 헛디디면 까마득한 설사면 및 크레바스 속으로 사라질 것 같아 정신을 바짝 차리며 올라가야 했다.
데날리 패스로 올라가는 1.5마일 구간의 설 사면은 그동안 많은 사고가 있었었는지 25m쯤 거리마다 스노 피켓을 설치해 놓아서, 카라비너를 걸고 안자일렌이 카라비너를 통과해서 가기만 하면 일행 중 한 명이 미끄러져서 떨어져도 스노 피켓에 제동이 걸리게 해놓았다.
모두들 데날리 패스에 도착(12:34) 배낭을 내려놓고 간식을 먹는다. 나도 얼어서 딱딱해진 찰떡파이 하나를 먹고, 허기진 배와 뼛속까지 파고드는 바람에 견딜 수가 없어서 우모복에 두꺼운 고어텍스 재킷까지 있는 옷 전부를 껴입는다.
드디어 하늘로 오르는 문이 열렸다. 체감온도가 영하 30도 이상 되는 엄청나게 불어오는 바람이 하늘로 오르는 장애물을 다 날려버려 반질반질해진 설사면 위를 거친 칼바람과 추위를 견디며 차근차근 오르니 나의 마음은 어느새 매킨리 정상에 가 있었다.
크레바스를 돌아서 검은 바위가 보이는 능선 위를 오르고 일본인들이 세웠다는 기상관측 안테나를 지나면서부터는 어디서 밀려왔는지 갑자기 보이지 않는 화이트아웃과 다시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하지만, 조금만 참자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만 힘을 내고 가자며 이를 악물지만, 숨소리는 더욱 더 거칠어지고 있다. 거친 바람과 함께 퍼붓는 눈보라에 고어텍스 재킷 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눈바람을 피해서 얼굴을 반대 반향으로 돌리고 삐딱하게 올라간다. 거센 눈바람에 눈썹까지 하얗게 얼어 바라카바라 주위에 얼어 있는 고드름을 주기적으로 떨어내며 하늘과 맞닿은 설산을 오른다.
평평한 경사진 곳에서 앞장서서 가던 가이드 팀이 걸음을 멈춘다. 가이드는 일행들의 얼굴을 일일이 들여다보며 괜찮으냐고 물어 본다. 바로 뒤쫓아가던 나도 그 곳에 서있으니 내 얼굴도 들여다보며 너는 괜찮구나 하며 말을 시키니 그들이 자기들에게나 신경을 쓰라며 핀잔을 준다. 가이드는 이 곳에서 정상까지는 세 시간 남았다며 이런 눈바람 속에서의 등반은 위험하다며 하산을 하니 두 명이 온 다른 팀도 같이 하산을 한다. 그때 우리를 지나쳐서 두 팀이 올라간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여야 되는, 내려갈 수도 올라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져 버렸다.
눈은 금세 쌓여갔고 발자국마저 지워져버렸다. 고개를 들어 보이지도 않는 산 위를 쳐다보지만, 퍼붓는 눈바람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을 만큼 눈보라는 세상을 하얗게 지우고 있었다. 정상 쪽으로 올라간 팀들도 사라지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한참을 망설이다.
귀때기를 후려치는 눈바람 속에 몸을 던지며 정상으로 향했다. 외부로 노출된 코끝에 차가운 눈바람이 스쳐가고 눈물과 눈자위는 어는 듯싶다. 하늘은 심연처럼 회색 색깔을 띠고 있었고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쌓인 눈을 헤쳐 나가는 것이 점점 힘이 들어지고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 앞에서 올라가고 있는 이들을 찾지 못하면 죽을 판이었지만, 나는 죽는다는 게 슬프다거나, 두렵다는 생각도 들지가 않았다. 운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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