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범수의 선교하는 삶

2006-07-2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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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서 만난 사람들(1)

남아공화국. 부유한 소수의 백인과 아직도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흑인들이 사는 곳. 공식적으로 국민 40퍼센트 이상이 에이즈에 감염되어 있는 나라.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드디어 의사 2명, 간호사 2명이 치과 사역팀을 이루어 함께 떠나게 되었다. 아프리카 지역에서 특별히 신경 쓰이는 것이 감염, 기구 소독 문제라 이번에도 우리 팀은 여러 가지로 예방대책에 신경을 써야 했다. 보건소를 찾아가 각종 질병에 대비한 예방주사를 맞았고 3주 전부터는 말라리아 약을 계속 복용했는데 주사부작용으로 며칠 동안 팔을 움직이지 못하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치과에서는 항상 피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소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얼마 전까지는 선교지 용으로 만들어진 조금 작은 사이즈의 소독기를 가지고 다녔었는데 어찌나 무거운지 트렁크에 들어가지도 않을뿐더러 비행기 짐으로 마구 굴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마침 선교에 열정을 가진 선배 한 분이 압력솥으로 소독을 대신할 수 있으니 사용해 보라며 하나를 빌려주었다. 압력솥 안에 피묻은 기구들을 넣고 진공상태에서 30분 이상 펄펄 끓이면 간염균과 에이즈균을 죽일 수 있다. 한국에서 만든 구닥다리 일반 밥솥인데 그래도 지난 몇 년 동안 세계 곳곳 선교지마다 안간데 없이 돌아 다녀본 관록 붙은 간이소독기였다.
떠나는 날. 일행은 각종 치과기재 외에도 선교지에 가지고 갈 약품, 원주민을 위한 생활필수품, 또한 주변에서 보내온 선교사를 위한 물품 등을 이민 가방 가득 채우고 귀한 밥솥까지 짐 보따리를 산더미처럼 싣고 공항으로 나갔다.
그러나, 아차! 그동안 짐 하나 당 70파운드까지 허용하던 항공사에서 50파운드로 무게제한을 낮추어 버린 것이 아닌가. 초과 벌금을 물고 짐의 개수를 조절하고 나니 더 이상 압력밥솥 들어갈 자리가 없다. “이건 우리가 기내로 들고 들어갑시다.” 나는 솥을 부둥켜안았다.
바닥은 불에 타서 그을고 뚜껑은 이리저리 부딪쳐 우그러진 솥, 가장 주요 부속품인 빨간 추가 없어질세라 양팔로 솥을 감싸안고 공항검색대 앞을 지나니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쳐다본다. 그래, 압력솥이다, 어쩔래? 이거 없으면 우린 환자도 못 보는데...... 남아공에서 기다리고 있을 선교사들과 현지주민을 생각하니 폼이 무슨 상관이랴. 승객들로 가득 찬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LA에서 남아공 요하네스버그까지는 약 20시간이 걸린다. 중간에 비행기 갈아타느라 기다린 시간까지 합치면 정말 지루한 거리이다. 날짜 상으로 3일 걸려 도착한 공항에서 마중나온 선교사님과 반갑게 악수를 하고 숙소에 짐을 푼 우리는 바로 이튿날부터 원주민 진료에 들어갔다.
L선교사는 빈민구제 사역을 하며 이곳에서 흑인 아동 2명을 입양하여 키우고 있다. 지금 7세, 5세 된 사라와 요한은 집에서 한국말을 쓴다. 사라의 친 엄마는 에이즈로 사망했고 아빠는 시각장애인이다. 흑인들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는 삶 속에, 아이들은 커서 부모처럼 원주민 선교사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다.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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