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뜻 있는 만남

2006-07-2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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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 집 앞에서 잔디를 깎다 보면 말쑥하게 차린 남녀들이 다가와 말을 거는데 한눈에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사람들이다.
내가 한국 사람인 줄 용케도 알아본 건지 대부분은 한국 사람들인데 특정 종파에 속한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쌀쌀맞게 굴지 않고 될 수 있는 대로 시간을 내어 앞뜰에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다. 성의를 무시하기도 좀 그렇고 이들의 생각을 알고도 싶은데다가 이들에게 부처님의 깨침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겪은 바로는 대개 좋은 사람들이고 예의도 바르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고 때로 꼭 막힌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우기는 사람들은 좀 줄어들지 않았나 싶은데 그만큼 이곳 기독교의 수준이 높아진 건지 자신감이 생긴 건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얘기하다 보면 개중에는 이전에 한국에서는 절에도 좀 왔다갔다했던 사람들도 있는데 막상 부처님에 대해 언급하는 걸 보면 거의 한심한 수준이라서 이게 보통 한국 불자들의 수준이었나 다시금 되돌아보게도 한다. 그만큼 대충 걸치고 있었으니 옷을 바꿔입기도 참 쉬웠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이곳 미국의 한국 불자들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이들 선교 요원들은 무슨 이야기든 말이 막히면 성경 구절을 찾아 내게 읽어줌으로써 나의 좀 짓궂은 질문에 가름하려고 하는 것은 공통되는 현상이다. 한 번은 중년의 남잔데 아주 믿음이 굳세었다. 사자와 얼룩말이 나란히 풀밭에 노니는 그림이 있는 얇은 팜플렛을 내보이며 곧 하느님의 왕국이 지상에 건설될 것인데 거기서는 아무도 늙어 죽지 않는다고 한다. 밥은 먹느냐고 하니까 먹는단다. 거기서는 사자도 채식을 하냐니까 그런 건 아니라면서도 그 세상에는 아무런 죽음도 없단다.
조금 더 따지니까 또 성경구절을 열심히 찾는다. 이런 식이니 얘기가 쳇바퀴 돌 듯 할 수밖에 없지만 눈동자엔 전혀 동요의 빛이 없고 읽어보라며 내게 조그만 책자를 주며 다음 주에 다시 만나 이야기하자고 한다. 그래서 나도 안에서 조그만 불교 책자를 가져와 주며 서로 바꿔 읽어보고 다시 같이 이야기하면 서로 이해가 깊어지지 않겠냐니까 끝내 받지 않아서 나도 그 책을 받을 수 없었다.
궁극적으로는 불자들의 책임이겠지만 많은 한국인 기독교들의 불교에 대한 인식은 기대에 훨씬 못 미치거나 아예 인식 자체가 없는데 이는 서로 불행한 일이며 세계적인 추세와도 동떨어진 일이다.
기독교를 모르고 서구문화를 이해할 수 없듯이 불교를 모르고 동양을 이해할 수는 없다. 이들은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인류의 미래를 매만져 나가고 있다.
오늘날 불교를 이해하는 것은 동양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쇼펜하우어, 니체, 하이데거, 푸코 등 불교 사상에 영향받은 서양 사상가가 많고 오늘날 불교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기독교 신학을 대폭 수정하는 신학자도 많다. 그리고 우리 한국인의 과거와 현재에 큰 영향을 미친 불교를 전혀 없는 양 제쳐두고 찾아낸 해결책이라든가 미래를 위한 설계도라는 것이 과연 얼마나 엄밀하며 과학성이 있을 것인가?
서로 바꿔 보지 못한 책자를 내려다보며 불교와 기독교가 처음으로 의미 있게 만난 것이 20세기에 일어난 일 중 가장 뜻 있는 일이라는 토인비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이 원 익
(태고사를 돕는 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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