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범수의 선교하는 삶 거짓말

2006-06-0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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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 친구 J가 말했다. “바이애그라를 사는 사람들은 한결 같이 덧붙이지. 내가 먹을 게 아니구요, 한국에 있는 친구 좀 사다주느라고… 아니, 누가 물어봤냐구.” 나는 J의 말을 들으며 끄덕였다. 그러게나.
나의 오피스에 찾아오는 환자들도 비슷하다. “제가 뭐 별거 먹은 것도 없는데 봉이 빠졌어요.” 혹은 “전 정말로 딱딱한 거 씹은 적이 없다니깐요.” 그런데 왜 치아에 금이 간담… 언젠가 호두 농장을 하시는 할아버지 환자가 찾아오셨다. 내가 “이거 얼마 전에 해넣으신 치아 아닙니까? 어금니에 금이 갔습니다.” 하고 설명하자, 그분은 두 손까지 저으며 말씀하신다. “아닙니다. 난 딱딱한 거 안 씹어요. 집사람이 오징어를 줘두 내가 저리 치우라구 합니다.” 네네, 그러시겠지요.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치료를 시작한다.
그때 간호사가 무슨 바구니를 들고 온다. “선생님, 이 환자분이 호두를 가져오셨습니다.” 감사를 표할 사이도 없이 할아버지가 체어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호두 한 알을 어금니 사이에 넣고 와드득! “맛 좀 보십시오. 호두가 알이 어찌나 실한지… 올해 수확이 아주 좋습니다. 헛헛헛”
봉이 빠진 환자마다 자기는 별로 먹은 게 없다지만 아이가 먹다 남긴 캬라멜을 무심코 입에 넣었을 수도 있고 하다못해 떡 한 조각을 씹었을는지도 모른다. 진짜 이유야 어쨌든 환자들은 절대로 먹은 게 없다고 우길 뿐이다.
치과는 무섭다.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다가 간다. 입 속에 들어오는 차가운 기구가 끔찍하다. 위잉--하고 이를 갈아대는 소리는 지옥이다. 이렇게 무섭다는 곳으로 나는 날마다 출근을 한다. 환자들의 귀여운 거짓말을 들으며, 때로는 입 벌리기를 거부하는 고집쟁이 어린이 환자의 입을 연다.
나의 환자 중에는 유도 선수도 있고 육체미 대회를 석권한 훌륭한 체격의 운동 선수도 있다. 그런데 환자 체어에 앉으면 겁에 질린 순한 양이다. “나는 평생에 무서운 게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치과는 정말 무서워요.” 나는 그들에게 마취할 때 쓰는 주사기를 보여준다. 또 입 안에 들어갈 기구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핸드피스의 위잉 소리는 왜 나는지, 치아의 어느 부분을 어떻게 치료할 것인지 설명해준다. 알고 겪는 통증은 알지 못하는 두려움보다 참을 만 할 것이다.
집에 오니 이제 막 치아교정을 시작한 딸아이가 울고 있다. 이를 빼야하기 때문이다. 교정 스페이스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영구치라도 빼내고 그 공간에 다른 이를 밀어넣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튿날 아이를 데리고 내 오피스로 가서 잇몸에 마취주사를 놓는다. “아아악! 살려줘요. 아빠는 나를 죽이고 있는 거지? 하나님! 구해주세요!” 아이가 엄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멈칫대는 것을 느낀다.
아이를 달랜다. “얘야, 하나두 안 아프다.”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하나도 안 아프겠는가? “조금만 참아라.” 이것도 거짓말이다. 조금이 아니라 5분은 참아야 할 것이다. “자꾸만 이러면 아빠가 더 아프게 뺄 거야.” 이런 거짓말이 어디 있담. 일부러 더 아프게 빼는 의사는 이 세상에 없다. “다 됐다. 이젠 정말 다 됐다.” 아니다. 아직도 좀 더 걸릴 것이다.
그러고보니 거짓말에도 등급이 있다. 그래도 의사 쪽 거짓말이 좀 낫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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