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랑의 칵테일

2006-01-2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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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마주쳤다. 친근하게 느껴진다. 어디서 또 만날 수 없을까 기회를 잡아보고 싶다.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고 가슴이 흐뭇해진다. 다시 만났을 땐 숨이 탁 막히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헤어질 때 너무도 싫고, 1시간 전에 헤어졌는데 또 보고 싶다. 그녀의 숨소리, 걸음걸이, 말소리, 웃는 모습, 앉아있는 자태, 쳐다보는 눈길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인다.
이렇게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반하는 경험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가? 흔히 들어온 ‘케미스트리’란 말은 무엇인가? 우리 뇌세포의 DNA 안에는 인간 림프구 항원(HLA)이라는 면역분자들이 있다. 이 항원은 각 개인이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질병을 대항해 저항할 수 있는 면역성의 종류와 숫자를 정해준다. 그래서 각 사람마다 어떤 종류, 또 얼마나 많은 질병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의 범위가 다르게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감기에, 어떤 사람은 기관지염에, 어떤 사람들은 방광염에 잘 걸린다. 또 별 질병 없이 평생 잘살아 가는 사람도 있다.
DNA는 림프구 항원을 통해서 짝 찾는 일을 직접적으로 통제한다. 수많은 사람들을 지나치는 중에도 내 면역분자와 전혀 다른 면역분자를 소유한 사람을 척 알아차리게 되어있다.
다시 말해 DNA는 내가 의도하기도 전에 이미 내가 가장 건강한 아이들을 낳을 수 있는 짝을 찾도록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짝이 어디 있나”하고 계속 찾다가 어느 날 딱 맞는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날 때 “어 여기 있었네. 저 사람이다!”하고 우리 의식의 관심을 포착한다.
DNA는 짝을 찾은 순간 감격의 춤을 추기 시작하고 “야 찾았다! 저 면역체들 보이지. 나에게 없는 항원들! 됐어. 충분해!” 하는 흥분된 메시지를 감정 뇌에 보내게 된다. 메시지를 받은 감정 뇌는 즉시 “알았어!” 하고 사랑의 분자(Phenylethylamine)를 분비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우리의 기분/감정을 조절하는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세라토닌들을 대량 생산하기 시작한다.
이 신경전달 물질들을 사랑의 칵테일이라고 나는 부르고 싶다. 이 사랑의 칵테일이 뇌세포에서 쏟아져 나올 때 오는 느낌은 뇌세포 모두를 암페타민 마약으로 기름칠해 놓은 것과 같은 황홀경의 상태가 된다. 이 상태를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고 말한다. 삶에 에너지가 생기고, 잠이 줄어들고, 먹어도 좋고 안 먹어도 좋고,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고, 살맛이 나고, 그 사람만 계속 생각나고, 바라보고만 있어도 행복함을 느끼곤 한다.
이때 대뇌 신피질(사고, 판단, 결정하는 기능을 하는 부분)을 MRI로 찍어보면 대뇌로 올라가는 혈액양이 평소 때보다 훨씬 감소되어 있음을 과학자들은 발표했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제정신을 잃게된다. 판단력이 약해지고, 미래를 볼 수 없으며, 결정에 필요한 정보들을 다 알아볼 생각도 안하고 무조건 좋다는 생각밖엔 없다.
이와 같이 사랑에 빠진다는 사실은 순전히 DNA의 저항력 항원숫자 맞추기 게임이다. 사랑의 칵테일의 생산은 약 2~3년 동안 유지되다가 사랑의 칵테일의 생산량이 줄어들든지 아니면 그 많은 양에 우리느낌이 익숙해지든지 하게 된다. 그때 우린 사랑의 황홀경에서 빠져 나오는 느낌(사랑이 식은 것 같은),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정상적인 경험(그래야 잠도 자고, 일도 하고, 아이도 보살피고, 밥도 하고 하지 않겠는가?)을 하게 되는 것이다.
황당한 일은 DNA의 짝 맞춤운동이 ‘좋은 배우자’를 찾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DNA는 오로지 림프구 항원 숫자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찾은 짝이 정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지, 집안을 잘 꾸려 나갈 건지, 직장에 충실히 다닐 건지, 아이를 잘 돌볼지, 감정조절은 잘 할 것인지, 대화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등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멀쩡한 사람이 무직에, 술 중독에, 분노만 가득 찬 사람에게로 끌려가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더욱 혼동스런 것은 DNA 맞춤이 일생에 단 한번만 생기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랑의 칵테일의 흥분기간을 지나서 정상적으로 잘 살다가도 내 DNA가 새로운 사람들 중에서 면역 분자의 좋은 짝을 가진 사람을 볼 때 또 다시 발작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큰 문제없이 행복하게 잘사는 부부들 중에도 갑자기 바람나는 일들을 보는 일이 이래서이다.
사랑의 칵테일에 빠진다는 것과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일은 별개의 일임을 우린 알아야 하고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한 사람을 사랑하며 행복한 가정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 계속 연재하기로 한다.

이순자 <상담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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