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6-01-2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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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

가끔 후배 여기자들과 부엌 일 스트레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다. 오늘은 또 뭐 해먹나, 장보는 이야기, 남편과 아이들의 식성, 아침식사에 관한 정보교환, 밥하기 싫다는 왕 짜증, 그러다가 결국에는 모두들 나를 미워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가장 부엌일이 싫다고 열변을 토하면서도 가장 열심히 하는 사람이 나인 것으로 판명되기 때문이다.
부엌과 요리에 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여자들은 모두 몸서리와 진저리와 넌더리를 치면서 괴로워한다. 별로 잘 안 해먹는다는 여자들도 마찬가지인 것이, 먹는 일은 하루 세끼 일년 365일 평생 계속되는 일이라 아무리 대충 먹고산다 해도 그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운 주부가 없기 때문이다.
요리를 잘 안하고 사먹거나 대충 해결한다는 여자들은 또 나름대로 남편과 아이들에게 괜히 미안하기도 하고 일종의 죄책감마저 느낀다고 고백하기 때문에, 부엌일은 죽을 때까지 피할 수 없는 여자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여자만 그런가하면 이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도의 차가 있을 뿐 다 비슷한 것 같다.
그렇게 수다가 이어지던 중 설거지 이야기가 나왔다. 요리를 하면 반드시 발생하는 설거지와 요리의 함수관계에 대하여 대다수는 ‘차라리 요리하는게 낫지, 설거지는 싫다’고들 말한다. 아주 드물게 ‘요리하느니 설거지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바로 그 부류다. 나는 요리는 싫어하지만 설거지는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 특이체질이다.
사람들은 내가 주방일기를 쓴다는 이유 하나로 요리하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절대 오해다. 대다수의 주부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하루 일과 중 밥하는 일을 가장 부담스러워한다. 요리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의 차이는 딱 두가지만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는데 그 하나가 바로 이 요리와 설거지의 선호도이고, 또 하나는 새로운 음식을 맛볼 때의 태도이다.
요리 좋아하는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이게 무슨 재료로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유심히 살피고 토론에 들어간다. 그 말은 집에 가서 자기도 해보고 싶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그저 감탄하면서 ‘이런 요리를 많이 사먹고 싶다, 누가 이런걸 나에게 자주 만들어주면 좋겠다’ 그런 생각만 하지 내가 해보겠다는 생각은 도무지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잔치집에 가서도 음식을 만들거나 식탁을 차리는 일보다 설거지가 가장 편하고 만만하다. 특히 다들 먹고 나서 각종 사이즈의 그릇과 컵들이 싱크대에 정신없이 쌓이기 시작하면 그 많은 그릇들을 깨끗이 닦아서 가지런히 정리하고 싶다는 불타는 욕구마저 생기곤 한다.
따라서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은 아무리 설거지가 많아도 부엌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는데, 내가 필사적으로 막기 때문이다. 엔간해선 남편에게 설거지를 시키지 않는 이유도 내가 착한 아내여서가 아니라 설거지만큼은 나 하고픈 대로 차곡차곡 해야 직성이 풀리는 탓이다.
그런 한편 설거지에 관한 수다중 쇼킹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몇몇 후배들이 설거지를 피하기 위해 식탁에서 일회용 그릇, 즉 종이접시와 종이컵, 나무젓가락을 일상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식구들에겐 좀 미안하지만, 차라리 미안한게 설거지하는 스트레스보다 낫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너무 놀라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그들을 마구 야단치기 시작했다.
“니들이 주부냐, 아무리 설거지가 싫다고 식탁에 종이접시를 내놓다니, 그렇게 담긴 음식이 맛이 있겠냐, 정성이 느껴지겠냐, 일껏 음식을 만들어서는 그렇게 아무렇게나 담아내다니…”
일회용 그릇은 말 그대로 일회용 아닌가? 매일 저녁 소풍놀이 하는 것도 아니고, 하루살이 식탁처럼 대강 먹고 치우다니 나로서는 좀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식탁의 존엄성 운운하며 화를 내가 천연기념물처럼 보였는지 후배들이 뻘춤하여 툴툴거린다. 설거지가 너무 싫으면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렇게 유난하냐는 것이다. 제 그릇 쓰는게 유난이라니, 세월이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나보다.
“나는 막 사는 사람이 싫고, 나의 가족이 막 대접받으며 살기를 원치 않아. 최소한 나의 아들이 막 차린 식탁과 정성이 담긴 식탁의 차이를 알게되어 훗날 아내를 고를 때는 그런 가정에서 자란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를 가릴 줄 알기를 바랄 뿐이지”
비웃음과 걱정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후배들이 수군거렸다.
“원겸이 장가 다 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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