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6-01-0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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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팔년 개띠

‘내 안에/ 개 한 마리 사네/ 멍, 멍 짖으며/ 오늘도 하염없이/ 지평선 흘러가네’ (이진영의 시 ‘58 개띠’ 전문)
‘58년 개띠 해/ 오월 오일에 태어났다, 나는/ 양력으로는 어린이날/ 음력으로는 단옷날/ 마을 어르신들/ 너는 좋은 날 태어났으니/ 잘 살 거라고 출세할 거라고 했다… 갑근세 주민세 한 푼 깎거나/ 날짜 하루 어긴 날 없고/ 공짜 술 얻어먹거나/ 돈 떼어먹은 일 한번 없고/ 어느 누구한테서도/ 노동의 대가 훔친 적 없고/ 바가지 씌워 배부르게 살지 않았으니/ 나는 지금 출세하여 잘 살고 있다’ (서정홍의 시 ‘58년 개띠’)
은희경 소설 ‘마이너리그’는 58년 개띠 남자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58년 개띠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연극 ‘용띠 위에 개띠’는 9년째 인기리에 공연중이다.
이달 중에는 ‘이 시대의 화두, 58 개띠에게 축배를’이라는 책이 나온다. 각계의 58년 개띠들이 ‘불혹’을 넘기고 ‘지천명’을 목적에 둔 중년으로서 스스로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털어놓은 책이란다.
‘58개띠 마라톤 클럽’에는 마라톤 풀코스 완주자만 460명이 가입해있고, 58년 개띠만 가입할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 ‘푸른하늘 은하수’ 카페는 회원이 13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2006년 병술년 개띠 해를 맞아 여기 저기서 58년 개띠에 관한 기사가 나오고 있다. 우리 신문 신년특집에도 58년 개띠 좌담회가 실린 것을 독자들이 보았을 것이다. 그 좌담회의 사회를 58년 개띠인 내가 보았다.
왜 58년 개띠인가? 57년 닭띠나 59년 돼지띠는 어디 가고, 46년 개띠나 70년 개띠도 아닌 ‘58년 개띠’만을 왜 사람들은 자꾸 이야기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와 분석들이 횡행하고 있으나 사실은 아무도 특별한 내용을 모른다는 것이 솔직한 이야기다. 끌어다 붙이면 안 되는 이야기가 어디 있는가. 우리가 겪었던 한국사의 굴곡과 비애들은 57년생이나 59년, 60년생도 다 겪었던 일들이었으니… (나의 개인적인 추론으론 모두 욕에 쓰이는 3개 단어- 팔, 년, 개가 함께 묘한 조합을 이룬 연도는 1958년이 유일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설운도, 한비야, 추미애, 마이클 잭슨, 마돈나와 동갑인 우리는 전후 기록적인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나 한 반에 70명이 넘는 ‘콩나물 교실’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한 이승복의 이야기를 들으며 철저한 반공의식을 갖추었으며, 국민학교 4학년때 갑자기 등장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역사적인 국민교육헌장을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달달 외우느라 무척 고생했다. 외국에서 대통령이 오면 모두 길거리에 나가 몇시간씩 기다리다가 카퍼레이드가 지나가면 열렬히 환영해야 했고, 일년에 한번 송충이 잡으러 가는 날이 있었으며, 기생충 박멸을 위해 집단으로 변검사를 하고 회충약을 먹어야 했다.
중3때 갑자기 고교평준화 정책으로 ‘뺑뺑이 1세대’가 된 우리는 그 배경이 박지만이었다는데 아무도 의심을 제기하지 않는다. 대학 3학년 때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졌고, 4학년 때 광주사태가 불거져 온 나라가 충격과 함께 혼란에 휩싸이자 군사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갔었던 동지의식이 있다. 학도호국단과 교련, 유신, 계엄령, 이런 단어들 속에 살아온 우리는 개떼처럼 수가 많아 치열한 입시경쟁, 취업난을 겪었으나 안정될 무렵 IMF로 정리해고 대상이 되어 ‘개피’ 본 세대로 꼽힌다.
그런데 그게 다인가? 스물네살에 이민 온 나는 인생의 반을 한국서, 나머지 반은 미국서 산 셈이니 한국의 58년 개띠들과는 조금 다를지 모르겠다. 그러나 마흔여덟을 맞는 느낌에 대하여 58년 개띠 좌담회에서 나는 이런 말을 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나이 드는게 좋다. 이젠 여성으로서의 외적인 아름다움은 잃어가는 시기에 돌입했지만 내적인 미를 가꿔가도 좋은 나이, 그리하여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과 연륜이 빛을 발하면서 전에 보지 못했던 나, 알지 못했던 내 모습을 발견해가는 것이 더 큰 즐거움이다”
해가 바뀌어도 오늘이 내일 같고 내일이 어제 같았던 날들, 새로운 시간들에 대해 별 감상 없이 지나던 나도 올해는 좀 남다른 느낌을 갖게 된다. 이제는 좀 다르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 늘 똑같이 산다는 것이 갑자기 너무 지루해져서, 전에 안 해보던 일, 안 가본 길, 안 좋아하던 것들을 조금씩 시도하면서 다르게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마흔여덟, 오팔년 개띠들의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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