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할아버지 II

2005-12-1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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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께서 고향인 함경남도를 떠나게 된 것은 만세운동에 가담한 차남, 즉 아버지 때문이었다. 함흥 영생고보를 졸업하고 3·1운동이 일어나자 같은 고보 출신인 선배의 권유로 함흥지역의 비밀 멤버로 가담하게 되었는데 궐기대회를 위한 준비가 잘 끝나고 당일 시간에 맞춰 입추의 여지없이 함흥극장에 모여 막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려는 순간 느닷없이 완전 무장한 일본 헌병들이 창문으로부터 일제사격을 하는 바람에 삽시간에 극장 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재빠르게 튀면서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뒤쪽으로 뛰어라! 일본 헌병에게 죽지 말자~”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으나 무사히 그 곳을 빠져 나온 아버지는 그 길로 북으로 북으로 길 없는 길을 달렸다. 그리하여 4년간 죽은 사람으로 되어 있었다.
그 사건의 리더는 무사히 상해로 도망가 임시정부 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고 유명한 학자가 되었다. 초당(Grass Roof)이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고 강용흘 박사이다.
함경북도 생기령 탄광에서 광부가 되어 있는 차남을 4년이나 걸려 찾아낸 할아버지는 비장한 각오로 고향을 떠나게 된다. 모든 일에 뛰어나고 모범적인 청년, 가문의 자랑이던 차남은 4년간의 유랑생활로 완전히 망가진 인생 길을 걷고 있었다. 사고무친한 외지에서 언제 관헌의 손이 뻗칠지 모르는 불안감에다 거친 광부들 틈바구니에서 오직 생명만을 이어가는 외로움 속에 위로가 되는 것은 여자와 도박뿐이었던지…
할아버지는 수렁에 빠진 차남의 이름을 바꿔주고 전혀 연고 없는 함경북도에 근거지를 옮기면서 일가족 전체의 과거를 완전히 묻어버렸다. 참으로 용기 있는 결단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것은 3·1 운동의 회오리 속에 풍비박산된 한 사람의 불행한 과거사일 뿐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하랴? 아버지는 평생 그때 얻은 버릇을 못 버렸으니까…
할아버지께서는 서당에서 교육받은 세대인데 일본어를 아주 유창하게 잘하셨다. 나는 미국 와서 30여년을 살았어도 말 때문에 안타까울 때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나라 말부터 잘해야 떳떳하게 살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고 계셨음이 분명하다.
어느 해 봄 연례행사로 벌이는 굿판이 온 동네를 뒤흔들며 닷새째가 되었는데 지서 주임이 나타났다. “미신 타파를 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는데 협조해 달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이틀만 더 하면 끝날 테니 조심해서 소리를 덜 내도록 하겠노라 하시고 7명이나 되는 무녀들을 가리키며 “이 사람들은 직업이니까 내가 이 일을 안 시키면 굶게 될 것이고 구경꾼들은 내 집에 온 손님들이니 함께 즐거움을 나누려는 것일 뿐 불온한 모임이 아니니 안심하시오. 날짜는 꼭 지키리다” 유창한 일본말로 좍 설명을 하니 “이틀만 더 하면 되지요?” 다짐을 하고 지서 주임이 할아버지에게 경례를 부치고 자전거에 올랐다. 평소 모범적인 분이니 믿어보자는 생각이었는지…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할아버지는 매일 신문을 소리내어 읽으면서 올림픽을 즐기셨는데 마지막 날 양정고보 학생인 손기정 선수가 1등으로 들어왔다는 기사가 실린 동아일보를 들고 어쩔 줄 몰라하시며 손주들에게 소리질렀다.
“조선사람이 우승을 했어. 3등한 남승용도 조선사람이야~” 며칠 후 할아버지는 고물 궤짝 맨 밑바닥에서 누렇게 된 흰 광목천을 꺼내 펴 보이시며 “우리 대한나라 국기란다” 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고향과는 완전히 차단된 생활을 하셨으나 어느새 사람을 시켜서 선산에 묻힌 선조의 뼈를 거두어 옮겨놓으셨다. 1년에 두 번 있던 성묘행사는 우리들의 큰 즐거움이었으니 며칠 전부터 일꾼들은 떡을 치고 며느리들은 음식을 만드느라 바쁘고 당일이 오면 3~4대의 달구지에 넘치도록 싣고 농군들이 앞장을 섰다. 선산은 참 먼 곳에 있었지만 산세가 아름다워 즐거웠다.
제사가 끝나면 할아버지는 떡 함지를 바위 위에 놓고 하늘을 향해 “새들아, 떡 먹어라~” 소리지르며 떡을 던져준다. 함지를 몇 개씩 비우며 하늘에 던진 후 큰 바위밑 구멍 앞에도 떡 함지를 놓으셨다. 나는 금방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나올 것 같아 몸을 떨었다. 그 다음은 사람들 차례. 농군들을 사방에 보내어 눈에 띄는 사람은 모두 불러다 큰 잔치를 벌이고는 즐거워하셨지…
돌아오는 길은 빈 달구지에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주들이 탔다. 어느새 해는 기울어가고 검푸르게 다가오는 울창한 숲을 가리키시며 할아버지는 힘있게 말씀하셨다. “저것이 다 너희들의 것이다. 저곳에서 나무하는 사람도, 산채를 캐는 사람도 다 우리 산을 바라고 살고 있으니 우리 가족과 같다” 해방이 되고 모든 것이 남의 것이 되리라고는 그땐 아무도 몰랐었지…
1941년 할아버지의 장례식 날 솔솔 바람이 불어 발치에 선 나의 코를 건드렸다. 덜 마른 오징어를 구울 때의 냄새였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체취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가 진정 흠모하고 존경하던 할아버지와의 작별이었다.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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