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5-12-1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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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식당

레스토랑 거리 라시에네가(La Cienega Blvd.)에 고급 브라질 식당이 오픈했다고 해서 지난 일요일 저녁 나들이를 했다. 마침 남편 생일인데다 평소 집에서 잘 안 해먹는 고기를 오랜만에 실컷 먹자는데 의견일치를 보아 세식구가 나선 것이다.
‘포고 드 차오’(Fogo de Chao)란 이름의 이 식당은 흔히 추라스카리아(churrascaria)라고 부르는 브라질리언 스테이크하우스로, 내가 가본 추라스카리아 중 가장 고급이었다.
‘라우리스 프라임 립’ 바로 건너편, 일식당 ‘마수히사’ 바로 옆집에 새로 지은 멋진 건물부터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였고, 입구에는 브라질 열대림을 연상케하는 폭포가 떨어지고 있었으며,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양쪽 벽면 가득히 천장까지 들어찬 와인 셀러가 세련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널찍한 실내, 높은 천장, 인테리어는 말할 것도 없고 서비스와 음식의 질이 최상의 것임을 분위기만 보아도 느낄 수 있는 ‘포고 드 차오’는 미리 예약했기에 망정이지 저녁 6시가 되기도 전부터 그 많은 테이블이 가득 찼다.
아시다시피 브라질 식당은 온갖 종류의 고기를 싫도록 먹을 수 있는 곳이다. 가우초(gaucho)라는 남자 웨이터들이 긴 쇠꼬챙이에 고기 별로, 부위 별로 꽂힌 바비큐를 들고 다니며 손님의 접시에 직접 잘라주는 특이한 서비스 때문에 고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바다소금을 쳐서 장작불에 구운(구워지는 모습을 길거리에서도 볼 수 있도록 특별 유리방 시설을 해놓았다) 소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닭고기, 소시지가 차례로 나오는데 소고기만도 필레미뇽, 탑 설로인, 치맛살, 갈비 등 여러 부위가 나올 뿐 아니라 마늘 양념한 것, 치즈 양념한 것, 베이컨에 말아 구운 것 등 다양하게 조리된 것을 즐길 수 있다.
가우초들은 이 고기들을 손님이 싫다고 할 때까지 계속 갖고 오기 때문에 손님들은 그 속도를 조절하기 위해 동그란 교통신호판을 사용해야 한다. 한 면은 초록색, 뒷면이 빨간색인 이 사인을 초록색으로 놓으면 ‘고기 주세요’이고 빨간색으로 뒤집어놓으면 ‘오지 마세요’이다.
오늘은 고기를 원없이 먹으리라, 각오를 하고 간 나는 우선 샐러드 바로 나가면서 남편과 아들에게 절대로 샐러드를 많이 가져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또한 테이블로 가져다주는 브라질 식당의 별미 치즈빵과 튀긴 바나나, 매시드 포테이토, 폴렌타에 대해서도 두사람의 손길을 세심하게 통제했다. 고기로 배를 채워야지 다른 걸로 채우면 아깝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해서 과연 얼마나 많은 고기를 먹었을까? 네번째 가우초가 왔다갔을 무렵 남편이 나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놀라서 물었다. “아니, 당신 얼굴이 왜 그래?”
나도 놀라서 되물었다. “왜, 내가 어떤데?”
“어디 아픈 사람 같애. 아주 고통스러워 보여”
그제서야 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울상이 되어 말했다.
“정말이지 더는 못 먹겠어. 고기 먹는게 너무너무 힘들어”
남편과 아들은 어안이 벙벙하여 잠깐 나를 바라보더니 깔깔대고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그렇게 아픈 표정으로 고기를 먹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는 둥, 카메라를 가져와 그 얼굴을 찍었어야 하는데 정말 아깝다는 둥, 뭐 그렇게까지 괴로워하면서 고기를 먹느냐는 둥…
가능한 많은 종류를 먹어보려고 가우초가 올 때마다 고기를 아주 소량씩 잘라달라고 했건만 세 번째 고기를 먹을 때부터 나는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상치나 깻잎 쌈장 같은 것도 없이 그냥 기름진 고기만 먹자니 금새 질린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매콤한 살사를 퍼다놓고 입맛을 달래보았지만 한번 물리기 시작하자 나중에는 고기가 입안에서 씹어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열심히 ‘울며 고기 먹기’를 했던 이유, 일인당 52.50달러라는 거금이 아까워 도저히 그냥 물러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본전을 빼야한다는 강박관념에 더 못 먹었을까? 다른 추라스카리아에서도 이렇게 쉽게 허물어지지는 않았는데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커피샵에 들러 진한 커피로 입가심을 하였다. 그랬는데도 입에서, 코에서, 계속 고기 냄새가 난다. 당분간 고기는 입에도 못댈 것 같고, 하루 저녁 외식비로 200달러를 훌쩍 넘게 썼으니, 이제부터 몇 달간은 쫄쫄 굶으며 손가락 빨아야할 일 또한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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